1. 작품 소개
“저 교수님 안 좋아해요.”
맑고 예쁜 눈으로 조곤조곤 할 말은 다 하는 조교 윤희민.
“……그거참 다행이군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늘 화제가 되어버려 혼자가 좋은 화학과 교수 서지혁.
지혁은 혼자가 편하지만 뭐 하나 흠잡을 구석 없이, 시키기도 전에 조용히 모든 걸 준비해놓는 윤 조교를 마다할 구실이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교수실 생활.
사람이 둘이나 있는 공간임에도 귀가 먹먹한 고요가 내려앉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인다.
마음이 쓰이고 눈길이 간다.
“교수님은 무슨 말이든 다 그럴듯하고 멋지게 하시잖아요.”
“…….”
“아, 저기 혹시 오해하실까 봐. 저, 교수님…….”
“알아, 싫어하는 거.”
일부러 표현을 조금 고쳐 말한 지혁이 그제야 턱을 들었다.
……쟤가 아니라고도 안 하네.
2. 작가 소개
최수현
필명은 연하늘빛.
다시 생각나고, 또 읽고 싶어지는
그런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blog. http://m.blog.naver.com/sparklingcho
▣ 출간작
기다려줄래
그 여름, 나는(2016 리디북스 로맨스 대상 수상)
당신의 자리
취향의 문제
겨울, 또다시
기억하나요
그곳에, 네가
비 내리는 밤
베이비 키스
가을, 만나다
현실의 그대
애인의 조건
결혼할까요?
하트 크러시
라이언 하트
처음 같은 너
3. 차례
#10
#11
#12
#13
#외전 1
#외전 2
4. 미리 보기
“다 왔어.”
멀지 않은 곳이었으니 도착도 금방이다. 오는 내내 꾸벅대던 희민이 흐릿하게 눈을 떴다. 말갛게 드러난 그 눈빛에 지혁이 저도 모르게 목울대를 울렸다.
“내릴 수 있겠어?”
“아, 네. 그럼요.”
반사적인 대답과는 별개로 문을 여는 것조차 시원찮았다. 그나마 남은 힘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억지로 대문 앞에 섰다. 따라 내린 지혁이 제 앞에 서자 희민의 발이 한데 붙어 있질 못했다.
“…….”
일부러 더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했었다. 혹시나 또 주체 못 하고 흔들릴까, 아니면 사촌을 만나 동요한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할까 싶어 고개도 제대로 들지 않고 그저 그의 음성만 따라 병원에서 여기까지 왔다. 차에 타라면 타고 내리라면 내리고. 그런데 막상 헤어질 순간이 되니 이성보다는 본능이 앞서버렸다.
오늘은 이게 마지막일 텐데. 몇 시간 남지도 않은 하루의 마지막을 앞두고 아쉽기 짝이 없다. 며칠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얼굴이라 더욱 간절해졌다. 용기 내 고개를 들던 희민은 그를 보자마자 이 텅 빈 것 같은 아쉬운 마음의 정체를 알아냈다.
“교수님, 정말 바보예요?”
어떻게 이러고 다녀. 오후에 헤어졌을 때와 똑같은 차림새에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시렸다. 여전히 제가 둘러준 목도리만 하고 있는 데 헛웃음이 났다. 지혁에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한 게 오늘만 벌써 두 번째였다.
“내가 왜.”
“이러고 다니시면 어떡해요. 차라리 저한테 코트 챙겨서 오라 하시지. 아니, 제가 챙겼어야 하는데 생각도 못 하고…….”
“일부러 그런 건데?”
“네?”
“그래야 네가 이 집 안에 들여보내줄 거 아니야.”
내가 얼어 죽을 것처럼 보여야. 지혁은 목도리를 풀어내는 것마저 넥타이를 끌어내리는 것처럼 권태로웠다. 사실 이것 하나 덕분에 달리 추위를 느끼지도 못했지만 그녀가 세상 무너지는 얼굴로 절 봐준다면, 추위쯤이야 기꺼울 정도다.
“……이래도 내가 바보 같아?”
말은 차갑게, 시선은 싸늘하게. 늘 그러고 살아왔으니 어려울 것도 없다. 그래도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지 기다리는데 그 초조함만은 가슴이 다 뭉그러질 만큼 뜨거웠다.
“감기 들 것 같아.”
그러니 속고 안 속고는 오로지 그녀에게 달려 있다.
◇ ◆ ◇
“잠깐만 계실래요? 제가 갈아입을 옷 좀 찾아볼게요.”
“……천천히 해.”
끝내 괜찮다는 말은 없었다. 따끈한 차를 들려줬지만 지혁은 어째 갈수록 추워 보였다. 보일러를 끝까지 틀어줘도 자신이 쳐다볼 때마다 팔을 쓱 문질렀다.
“아빠 예전에 입으시던 옷이 있을 텐데. 그런데 교수님이 입으시기엔…….”
“난 다 잘 어울려서.”
추워서 그런지 뻔뻔한 소리도 더 그럴듯했다. 제집에서 쫓겨나듯 방으로 들어선 희민이 서랍 아래 칸을 열어보았다. 죽은 사람의 물건이니 모두 다 태우라는 고모의 말을 차마 따를 수가 없어 이렇게 따로 챙겨두었다. 그리고 한 번씩 못 견디게 그리운 날엔 꼭 끌어안아보았다. 지민이 보면 힘들어할까 꽁꽁 숨겨놓고는 아무도 없을 때 여기에 얼굴을 파묻곤 했다.
“……아빠, 나 왔어.”
늘 하던 대로 아빠를 부르는데 오늘은 마음이 허물어지진 않았다. 이것도 추워서 그런 걸까. 아니면 하루 종일 뜨거웠던 머리 때문일지도 모른다. 긴장이 확 풀리자 일어서지도 못하고 무릎을 끌어안았다.
“아빠.”
자꾸 불러서 뭘 어쩌려고. 이러는데도 마음이 잘 버티고 있다는 것이 신기해 몇 번 더 불러보았다. 밖에 지금 누가 있는데 말이야. 오히려 떨림만 더해져 제 마음을 툭 털어놓았다. 아, 그 사람이 누구냐면, 오늘 우리 지민이가…….
“으음.”
안도하듯 무릎에다 머리를 댄 희민이 잠시 눈을 감았다. 내려앉기만 기다린 것처럼 순식간에 무거워진 눈꺼풀이 다시 들리질 않았다. 노곤한 몸에 가느다란 숨소리가 얽혀 어느 순간 고개가 툭 떨어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절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걸 아는데도 몸이 무거웠다. 이것 역시 지금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이제껏 저를 기다리는 사람들 대부분은 바라는 것, 혹은 받아 갈 것들이 있었다. 명세서를 들고, 또 각종 서류를 내밀며 그녀를 긴장 속에 밀어넣었다. 잠깐 방심이라도 하면 대번에 뜯어먹힐까 싶어 지민을 뒤에 두고 눈을 최대한 크게 떠야만 했다.
‘……교수님.’
하지만 그는 제집에 들이고도 겁이 나질 않았다. 지혁이 가까이 있으면, 제가 지민의 등을 토닥여주는 것처럼 심장이 그리 뛰었다. 그저 눈을 감아도 따가운 시선 한번, 차가운 바람 하나 닿지 않을 것만 같다. 서서히 데워지는 바닥을 향해 희민의 고개가 푹 꺾였다.
◇ ◆ ◇
“제발…….”
입술이 먼저 움직이고도 눈이 바로 뜨이질 않았다. 그러니 여기가 현실인지 꿈인지, 그것조차도 불분명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어디에 누웠길래 이리 푹신하게 녹아드는지도 알 수가 없다.
“사실은 다 꿈일지도 몰라. 진짜로 모르겠어.”
지민이 한 말도 제가 겪고 나자 절절히 이해가 갔다. 꿈은 온통 뒤죽박죽이다.
“제발…… 제발이요.”
울고 기도하고, 또 어딘가에 간절히 매달렸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 기억이 그리 절망스럽지 않은 걸 보면 역시 꿈일지도 모른다. 며칠간 지혁을 멀리해야만 했던 아픈 마음만 더욱 생생해졌다.
“교수님?”
“……일어났어?”
눈을 번쩍 뜬 희민이 숨을 몰아쉬자 지혁의 손이 다가왔다. 이불을 끌어올리고도 모자라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 규칙적인 박동이야말로 모호하던 꿈과 현실을 부드럽게 뒤섞어버렸다.
“교수님.”
뭉근해진 머리로 그를 가장 먼저 불러보았다. 지혁의 입꼬리가 피식 올라가자 희민이 울 것 같은 눈으로 따라 웃었다. 교수님 앞에서 이렇게 누워 있다니. 벌떡 일어나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미안해요, 잠들어버려서.”
“괜찮아. 조만간 자를 거라서.”
“…….”
농담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말에 희민의 하얀 이가 드러났다. 한껏 조명을 낮췄음에도 서로를 살피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지금 몇 시예요?”
“2시, 아니, 3시쯤 됐겠다.”
“하아. 몰랐어요. 가시지 그러셨어요.”
“그러려다가. 너한테 못 한 말이 생각나서.”
지혁이 턱을 괴었다. 나비처럼 우아하게 깜빡이는 그녀의 눈을 보며 그마저도 바람이 들지 않게 지켰다.
“……너 괜찮아?”
“……네?”
“지민이는 괜찮은 거 봤는데. 또 남들도 그렇다고 하니까.”
“아, 저 괜찮아요. 몇 시간 잤더니 몸도 다…….”
“몸 말고. 마음은 좀 어떠냐고.”
지혁의 고개가 더욱 가까워졌다. 그녀의 삶에 빠져 있는 모든 순간을 채워주겠다는 결심은 변한 적이 없다. 남들은 일상처럼 주고받는 말이라도, 희민에게는 누구도 건네지 않는 말이었으니 꼭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윤희민 씨, 오늘 많이 놀랐을 텐데 불안하지 않았어?”
“……으흑.”
“봐. 안 괜찮잖아.”
지혁의 든든한 엄지손가락이 희민의 눈물을 닦아냈다. 그러고도 뺨에 머물러 있는 그 손을 희민이 마주 잡았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얽히는 감촉, 미련, 작은 움직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너무 무섭고 겁나고 떨렸는데…… 지금 다 괜찮아졌어요.”
“그건 진짜 맞네.”
희민의 웃음을 감상하듯 지혁이 손을 꽉 잡은 채 반대쪽 팔로 머리를 받쳤다. 그녀가 누운 침대 위는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몸이 파묻힐 것처럼 따스했다. 여기서 더 나가면 오늘 집에 못 간다. 비록 희민에겐 솔직하라 요구했지만 한계에 다다른 욕망을 감추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이다.
“……이제 갈게. 가야겠다.”
“말로 하라고 하셨죠?”
“…….”
풀리는 손깍지에 희민이 아까처럼 버텼다. 하지만 이번엔 그에게 감아줄 목도리가 없으니 남은 손을 길게 뻗었다. 까칠한 지혁의 뺨이 제 손안에서 꿈틀거리자 그 느낌이 손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안 가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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