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의미 없는 하루가 지났다. 명후의 출장까지는 고작 1주일 남짓 남았다. 열흘간의 미국 출장을 앞둔 명후의 신경은 꽤나 예민해졌다. 그 사이 명후는 유주를 한 번 더 만나 헤어지자는 말을 한 것 같았고 하진에겐 유인의 전화가 왔지만 무시했다.
그 1주일간은 참으로 길고도 짧았다. 하진은 그의 침대에서 매일매일 자고 깨어났다. 명후는 하진의 몸 상태를 고려해서인지 그녀를 함부로 안으려 들지 않았다. 1주일에 단 세 번. 혈기왕성한 명후로서는 겨우 참을 수 있는 한계의 숫자라 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정사만으로도 하진은 너무 힘들었다. 최대한 부드럽게, 최대한 길게 시간을 지속하며 애써 절정을 고조시키는 애무와 섹스. 명후가 선사하는 부드러움은 가혹할 정도였으며 성 고문에 가깝기도 했고 하진을 흥분시키기 위한 일방적인 헌신 같기도 했다. 마치 하진의 몸에 명후 자신을 각인시키는 하나의 의식에 가까웠다.
하진은 그의 모든 향기에 취하고 반응하게 되었다. 그의 손에서 몇 번이고 절정에 올라 흐느끼며 그의 이름을 불러 대었다. 탈진할 즈음, 명후는 잔뜩 젖어 있는 그녀의 입구로 진입하며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 속도조차 감질나도록 느려서 하진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렇게 이어진 절정은 지나치게 중독적이었다. 명후에 의해 길들여지고 있었다. 어떤 남자도 하진에게 그런 절정과 헌신을 선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았다.
출장을 떠나기 전날, 하진은 명후의 짐을 쌌다. 커다란 트렁크에 몇 벌의 양복과 셔츠, 속옷, 양말과 여벌의 옷을 챙겨 넣었다. 명후는 쉴 새 없이 비서와 통화를 하며 미국 현지의 사정과 동향을 파악했다. 마지막으로 모든 서류가 들어 있는 노트북과 메모리, 여권과 비행기표를 챙기자 모든 준비가 끝났다.
“누나 혹시 갖고 싶은 거 있어? 필요한 화장품이나 가방 같은 거 말이야. 일단 누나 새 옷이 필요할 것 같은데, 시간이 없으니 다녀와서 사자.”
“당장 필요한 건 없어.”
“그래? 좀 살이 찐 것 같기도 한데. 누나 혹시 임…….”
임신이라는 말을 꺼내려던 그가 머리를 흔들었다. 피임은 계속 하고 있었고 하진은 명후에게 곧 생리를 할 거라 귀띔했기 때문이다. 하진은 생리 전에는 몸이 붓고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스트레스의 원인인 일도 그만두었으니 마음이 편해서 조금 살이 붙은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명후는 묘하게도 불안했다. 자신이 떠나면 하진 역시 이 집 안에서 증발해 버릴 것 같았다. 하진은 요즘 부쩍 유령 같아 보였다.
“제발 사라지지 마. 그렇게 텅 빈 눈 하지 말라고.”
하진은 울먹거림에 가까운 명후의 말을 듣고 그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잘 다녀와.”
하진은 하지 못한 말들을 속으로 삭였다.
더는 기다리지 못할 것 같아. 너무 오래 기다려서 지쳐 버렸거든. 이젠 기다릴 힘이나 재간 따위 없어.

다음날 하진은 명후를 배웅했다.
그는 자신을 데리러 온 비서와 함께 일찍 공항으로 출발했다. 오전 9시경에 뉴욕으로 출발하는 비행기였다. 대경그룹과 미국 A사의 중요한 기술협력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고, 이번 프로젝트의 향방에 따라 그룹 안에서 명후의 입지가 결정될 거라 들었던 것 같다.
하진은 그를 배웅하고 두 시간 쯤 뒤, 그가 걸어 온 전화를 받았다.
- 곧 티켓팅하고 탑승할 거야. 갔다 올게.
“그래. 잘 다녀와.”
명후의 비행기가 이륙할 시간이 지났다. 하진은 며칠 만에 외출을 했다. 감시자가 따라 붙었지만 그 시선에는 상관없이 밀린 일들을 했다. 은행에 가서 예금을 정리하고 가벼운 산책으로 기분 전환을 하고, 그 다음날에는 미술관으로 출근했다. 또 그 다음날에는 홍대로 가서 거리를 돌아다녔다. 예쁜 소품을 구경하거나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혼자 먹기도 했다.
하진은 매일 명후와 통화하며 자신이 하루 동안 한 일들을 알려 주었다. 명후 역시 그녀의 변화를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프로젝트는 순항 중이라며 활기차게 성과를 보고했다.
명후는 출장을 떠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 양사가 기술협력에 합의했다고 알려 왔다.
“잘 됐네.”
- 일단 이틀 뒤에 돌아갈 거야. 간단한 세부 결정 사항들이 남아 있어서 여기선 한 1, 2주 더 머무르면서 나머지를 해결하자고 그러는데 귀찮아.
“몸조심해서 돌아와.”
전화를 끊은 뒤 하진은 자신의 방을 돌아보았다. 방은 가구 이외엔 사람의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살벌하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하진은 은행에서 사표를 내고 나오던 날 샀던 원피스와 카디건을 입었고 단정하게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었다. 늘 들던 빅 백에 속옷 한 벌과 갈아입을 부피가 작은 옷 한 벌, 그리고 지갑과 여권을 챙겼다.
딸아이가 산후조리원에 들어갔다며 휴가를 마친 천안댁이 어느새 돌아와 있었다. 하진이 거실로 나오자 천안댁은 조금 부풀어 있는 큰 가방을 보았지만 매일 들고 다니던 익숙한 가방이었기에 별 의심은 하지 않는 듯했다.
“어디 나가?”
천안댁이 물었다.
“잠깐 산책하고 오려고요.”
며칠간 지나칠 정도로 쏘다녔기에 천안댁은 의심하는 기색이 없었다. 하진은 바깥으로 나왔다. 빌어먹을 정도로 좋은 날씨, 그대로 증발하듯 사라지지라 생각하지 못한 차림이다.
하진은 서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 여사는 이틀 전 모든 게 완벽하게 준비되었다고 알려 왔지만 하진은 명후의 프로젝트가 성공할 때까지 잠시 도주를 미뤄두었었다.
“이제 됐어요. 몸조심하세요.
- 알았다.
다정한 말도 작별 인사도 없었지만 그것 역시 서 여사다웠다. 하진은 통화를 끝내자마자 휴대전화와 배터리를 분리했다. 서 여사가 알려 준 곳이 어딘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명후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건 이 방법 밖에 없다. 강제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면 샴쌍둥이처럼 기형적인 관계로 붙어서 서로를 함께 죽여 갈 것이다. 명후가 상처를 덜 받길 바랐다. 어둠으로 떨어지는 건 그녀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하진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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