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 저는요…… 그저 의례적이고 별 거 아닌 말인데도 선배님의 입을 빌려, 선배님의 목소리로 들으면 그게 어떤 말이었다고 해도 뭔가 의미 있고 엄청난 말이 되어버려요. 왜 그런지…… 선배님 혹시 아세요?”
“정희수…… 처음으로 누군가가 막 보고 싶어져서 심장이 쿵쾅거렸어. 앞으로는 자꾸만 뭐든 해주고 싶어서 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질 것 같아. 이런 마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너는…… 아니, 그 답을?”
“선배님…… 저요…… 너무 행복한데, 행복하단 소리를 못하겠어요. 나한테 찾아온 행복이,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게 너무 조심스러워서…….”
둘만의 작은 공간이 의식되어서 잠든 척하고 있던 시윤은 결국 한숨을 내뱉으며 희수의 목을 꼭 끌어안고 말았다.
‘난 말야…… 행복도 조심스럽다고 얘기하는 네가 안쓰러워 죽겠어.’
“내가 네게 뭔가를 줄 수 있다면…… 그건 가감 없이 모두 다 네 거야. 그러니까 정희수…… 이걸 받아도 되나 어쩌나 하는 그런 고민 같은 건 절대 하지 마. 그리고 마음껏 행복해지는 거야. 넌 이시윤의 정희수니까…… 알았지?”
어둠 아래에 닿아있던 그의 입술은 그렇게 몇 번이고 다짐을 받았다. 그의 다정스런 손길, 따뜻한 품 속 만으로도 넘칠 만큼 위로를 받은 것 같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형태의 행복이 되어 마음속 깊숙이 박혀왔다.
이시윤의 정희수니까…… 그래, 이시윤의 정희수니까…….
“정희수, 누군가는 상대방의 상처까지 다 알고서도 사랑할 수 있어야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말야. 나는 사람을 사랑하면서 꼭 상처부터 알아야 하는 건지를 잘 모르겠다. 속속들이 다 몰라도 난 이미 널 사랑하고 있고 또 계속 사랑할 건데……. 나는 말야. 네 상처를 들으면서 마음 아파하는 대신 네 손을 한 번 더 잡고, 너를 내 품에 한 번 더 안고, 그리고 네 입술에 한 번이라도 더 입 맞추고 싶어. 나는 그렇게 너를 사랑하고 싶어. ……사랑한다, 내 예쁜 정희수…….”
그렇게 손을 잡고, 품에 안고, 그렇게 다가온 그의 입맞춤 때문에 희수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가끔씩 생각했었다. 하나하나 내 상처들을 되짚어가며 내 입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려면 얼마나 더 시간이 지나야 할까.
하지만 그는 말했다. 그녀의 상처를 그녀의 입으로 들어가며 마음 아파하는 대신 한 번이라도 더 손잡고, 품에 안고, 입 맞추겠다고. 희수는 그의 사랑이 너무 깊고 크고, 또 다정하고 자랑스러워서 가슴이 아릿해졌다. 발꿈치를 들어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이런 작은 몸짓만으로도 그녀 안에 담긴 사랑의 100분의 1이라도 전달되었으면…….
용기 내어 그에게 불어넣는 온기만으로도 그녀가 품은 사랑의 100분의 1이라도 전달되었으면…….
그런 마음들이 모두모두 합쳐져서 그와 그녀에게 피와 살이 되는 사랑이 되기를…….
그렇게 간절하게 바라게 되는 한여름의 깊은 밤이었다.
"이렇게 널 가지는 일은 절대 없어.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네가 사랑스러워 미쳐버릴 것 같은 어느 날이면 아마 네 가슴을 만질 테고, 또 더한 어느 날엔 네 가슴에 키스를 할 테고, 그리고 더 더한 날엔 네 모든 곳에 내 흔적을 남길 거야. 그러니까 그때가 되면 날 거부하지 마, 공주님. 아님 난 괴로움을 주체 못해 거품이 되어 사라질지도 모르니까.”
깊고 짙어진 눈동자로 그렇게 말한 그는 짧게 입맞춤을 남겼고, 이내 크게 웃었다.
그의 말에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떨렸다는 걸 그는 아마 모르겠지.


“오빠, 진짜 점점 안 아프네? 와, 사랑이 정말 좋은 거긴 좋은 건가 봐요.”
“이제 알았냐, 정희수? 생리통도 사라지게 해주고 말야. 너 이제 나 없이 못살겠지?”
“치, 말도 안 돼. 타이레놀이라는 게 있는데 겨우 생리통 때문에 오빠 없다고 못살겠어?”
“뭐? 타이레놀? 것참, 타이레놀이 경쟁자라니……. 타이레놀을 두고 질투를 하는 날도 오는구나. 진짜 이시윤 인생이 왜 이렇게 됐냐?”
그렇게 말하면서도 여전히 시윤은 잠시도 쉬지 않고 다정하게 그녀의 배를 쓸었다. 희수는 한참 키득거리며 웃다가 몸을 옆으로 돌려 그를 마주 보고 꼭 껴안았다.
“나도 사실은 가끔씩 진짜 궁금해요. 오빠 없이 나 살 수 있을까……. 근데 사람이 아무리 사랑을 해도 그렇게 그 사람 없으면 살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래, 안 되지.”
“으응? 오빤 그래? 그게 딱 그렇게 돼요?”
“이론상으로는. 이론상으론 안되는 게 뭐 있겠냐?”
“으응, 이론…… 맞아.”
“정희수, 나는 너를 보고 있으면 이제 생각을 할 수가 없어. 자꾸만 마음이 먼저 움직여버려서.”
그도 그녀의 등을 꼭 껴안아왔다. 그의 따뜻함이 전부 그녀에게로 오는 것 같았다. 희수가 먼저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진하게 입맞춤을 날렸다.
“오빠 때문에 나는 정말 미치겠어. 그렇게 진지하게 마음을 얘기해버리면 나는 또 마음이 이만큼이나 커져버려서 꼭 터질 것 같아진단 말야. 그러면 갑자기 막 걱정이 되기 시작해. 용량초과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릴까 봐.”
“바보야, 나는 이미 용량초과야. 타이레놀한테 질투하는 내가 어디 제정신이냐?”
희수는 깔깔 웃어버리고 말았다. 어디선가 타이레놀이 걸어올 것만 같은 기분이다. 어느새 생리통은 어딘가로 날아가 버리고 그 자리엔 딱 붙어버린 두 사람과 잔뜩 위로 올라간 그녀의 티셔츠, 그리고 요상해져버린 분위기만 남아 주변 공기를 온통 데워놓았다.
다가온 입술의 온기 때문에 어쩔 줄을 모르며 입술을 내어주고 있을 때 그의 손이 배를 지나 가슴 위로 올라왔다. 킥킥 웃으며 배로 가져다 놓아도 마치 귀소본능을 가진 제비처럼 가슴으로 찾아오는 그의 손을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그냥 놔둬. 얘는 워낙 본능적인 녀석이어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덕분에 깔깔 웃으면서도 생리통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그 밤, 별채는 유난히도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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