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파혼, 하고 싶어요.”

이름뿐인 몰락 귀족 로사 엔테인. 그녀에게는 델바인 왕국 최고의 신랑감이라는 약혼자, 수도 치안대장 헨리 에카르트가 있지만 어린 시절 약혼한 이후로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시간이 흘러 파혼을 생각하는 그녀 앞에 나타난 헨리는 완벽한 약혼자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언제나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주는 치안대의 마법사 아실 로건과 약혼자 헨리, 두 사람 사이에서 로사는 고민에 빠지는데…….

“그리고 가장 하고 싶었던 것도 떠올랐고.”

“그게 뭔데요?”

로사가 물었다. 그러자 헨리가 웃었다.

“연애.”

2. 작가 소개

김유린

물병자리, A형

나만 고양이 없어!

트위터 : @yurin0925

▣ 출간작

용의 꽃

다이아몬드의 신부

3.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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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리 보기

화창한 오후, 헨리는 로사를 점심식사에 초대했다. 예의바르게도 카드와 수선화 꽃다발을 보내 방문을 알린 그는, 약속시간에 정확히 나타났다. 일이 바쁜지 평소와 달리 치안대 제복 차림이었다.

“헨리.”

“로사.”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호전된 관계지만, 그래도 여전히 일반적인 약혼관계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이렇게 뻣뻣한 약혼관계가 세상천지 어디 있겠는가. 아니, 오히려 원수처럼 으르렁거리거나 좋은 관계를 위해 노력한다든가, 혹은 서로 냉정하게 계산하느라 바쁘다든가. 그래, 차라리 그게 나을 것이다.

“저번의 일은…… 미안합니다. 혼자 놔두는 것이 아니었는데.”

마차에 오르자 헨리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로사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아 그녀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괜찮아요. 업무 때문이었잖아요.”

로사의 대답에 헨리는 고개를 저었다.

“업무가 아니라 제 직책에 따른 의무였죠. 잠깐 미뤄두어도 아무도 탓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죠. 부디 용서해주시겠습니까?”

로사는 헨리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치안대장이 치안대의 임무가 당연할 것을 미루어둔다는 생각을 하다니, 헨리답지 않았다.

“진심이에요?”

로사는 자기도 모르게 벌어지려는 입을 꾹 다물었다. 헨리가…… 변하고 있다.

“아뇨,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제가 용서할 것이 뭐가 있나요. 전 정말 괜찮았어요. 그러니 그 얘긴 이만 끝내요.”

로사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애써 미소 지었다. 아실 로건으로도 모자라서, 헨리 에카르트까지? 설마.

하지만 아실 로건은 몰라도 헨리 에카르트라면, ‘기적 같은 일’이지만 진심으로 헨리가 자신에게 관심이 생겼다면, 그건 환영해도 괜찮을 일이다.

물론 여전히 로사의 마음 한켠에선 헨리가 파혼을 해주기를 원하고 있지만, 그 가능성이 점차 희박해지는 것처럼 보이니까…….

……모르겠다. 로사는 이제 제가 헨리와의 약혼을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조차 헷갈리기 시작했다.

헨리의 약혼녀 자리는 무척이나 고되고 힘든 자리지만, 시댁이 될 에카르트 백작가의 안주인은 그녀를 무척이나 총애하고 있었다. 사실 로사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결혼으로 진행해도 될 정도의 이유가 되었다. 며느리를 그렇게 아껴주는 시어머니는 없을 테니까. 특히나 이 시대의 여성들에게는 더 그렇다.

아니면 백작가에서 선물해주는 것들 때문에?

속물적이지만 그건 사실 정말 중요한 것 중 하나다.

그것도 아니라면, 헨리의 그 잘난 외모? 익숙해졌다 싶으면 다시 심장을 흔들어놓는 그 얼굴?

그녀는 그럴 때마다 그녀를 싫어하는 사교계의 소녀들을 떠올린다. 화가 나고, 억울하고, 슬프다. 줄리아는 우울해하는 로사에게 말했다.

「네가 에카르트의 약혼녀가 아니라면 다를 것 같아?

천만에. 걔네들은 무슨 흠을 잡아서라도 널 괴롭힐걸. 원래 그런 애들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우울해할 것 없어. 네가 아니라도 걔네들이 괴롭히는 여자앤 많으니까. 그냥 넌 그중 하나야.

고개 들어. 넌 잘못한 거 아무것도 없으니까 당당하게 굴어.」

위로해주는 건지 욕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로사는 줄리아가 곁에 있어서 버틸 수 있었다.

“……로사?”

어느새 멍하니 있었는지 헨리가 말을 걸어왔다. 새파란 눈이 바로 얼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너무 가까워!

“아, 네. 헨리……?”

눈을 깜빡이고 있자니 헨리의 얼굴이 코끝을 스칠 듯 말 듯 점차 다가왔다. 숨결이 가까워지고, 나무 같은 향기가 났다. 새파란 두 눈이 로사를 움직일 수 없게 했다. 익숙한 눈동자, 백작부인에게서 고스란히 물려받은 그 특유의 파란 눈.

헨리의 눈동자는 청금색처럼 어둡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로사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을 때 뜨거운 입술이 닿았다.

두 사람 주위에 내려앉은 정적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겁거나, 가벼웠다. 아니면, 깃털 같은 걸까.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제멋대로 날아가버리는.

헨리의 커다란 두 손이 로사의 뺨과 어깨를 잡았다. 그것은 너무 뜨거워서…… 닿는 곳마다 불길이 일었다.

“…….”

영원과도 같은, 찰나의 입맞춤이 끝나고 나자 헨리는 로사의 손을 잡고 가벼운 키스를 했다.

“이건 미안하다고 하지 않을 겁니다.”

헨리는 로사의 귓가에 속삭였다. 로사는 전율이 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난 당신이 필요해요, 로사.”

로사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헨리는 마차의 문을 열고 내렸다. 어느새 마차가 멈춘 것도 모르고 있었다. 붉어진 로사의 뺨을 못 본 척하며 헨리가 손을 내밀었다.

“내리시죠, 나의 장미.”

로사는 새빨개진 얼굴로 겨우 헨리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로사의 말문을 막는 것에 성공한 헨리는 스테이크를 썰었다. 그의 보좌관들이 그의 얼굴을 보았다면 최근 들어서 최고로 행복한 얼굴이라 단언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로사는 빨개진 얼굴로 깨작깨작 스테이크를 찢고 있었다. 헨리는 보다 못해 자신의 접시와 그녀의 접시를 바꾸어주었다.

잘 썰린 스테이크임에도 로사가 제대로 씹지 못하자 드디어 헨리가 칼질을 멈추었다.

“입에 안 맞으십니까? 다른 걸로 가져오라고 할까요?”

“아니에요.”

겨우 그것만 말하고 로사는 얼굴을 숙였다.

세상에! 그녀에겐 첫 입맞춤이었다.

로사는 너무 부끄러워서 당장에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팔랑거리고 굽은 높았으며, 도망친다고 해도 헨리는 손쉽게 그녀를 잡아챌 것이다.

그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놀랍게도 그 헨리 에카르트가 쿡쿡거리면서 웃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동물을 보는 것 같은 그 얼굴에, 로사는 점점 더 고개를 들 수가 없어졌다.

“그러다 접시와 부딪치겠군요. 자, 이걸 먹어봐요. 이건 입에서 살살 녹을 겁니다.”

헨리가 포크로 찍어서 건네주는 것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받아먹고 만 로사는 체념한 얼굴로 씹고 또 씹었다. 실제로도 스테이크에 곁들여져 나온 버섯과 새우 요리는 기막히게 맛이 좋았다.

하지만 헨리가 건네주는 것을 받아먹는 것이 문제였다. 거절하고 싶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해?

“맛이 괜찮을 겁니다.”

헨리가 싱긋 웃으며 이번엔 스테이크를 잘게 잘라 포크로 콕 찍어 입에 넣어주었다. 로사는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아무렴 어때. 정말로 목소리가 안 나오는걸.

그녀는 병아리처럼 헨리라는 닭이 물어다 주는 음식을 받아먹었다. 헨리가 예약한 식당은, 잘 모르는 그녀가 느끼기에도 무척 고급인 것처럼 보였다. 나오는 요리 하나하나마다 맛이 혀에 녹아들 듯 스며들었다. 스테이크도 질긴 것 하나 없이 이로 씹자마자 부드럽게 으깨졌다.

로사가 얌전히 음식을 받아먹자, 헨리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백작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남에게 수발만을 받으며 살아왔던 그는, 아카데미에서 처음으로 스스로의 손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그때 자신은 꽤 멍청이처럼 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다행히 요령이 있어서 금방 배웠지만, 처음으로 자신이 얼마나 안온한 생활을 영위해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로사에게 음식을 떠먹여주면서 그때의 처음으로 스스로 무언가를 해냈을 때의 뿌듯함이 되살아났다.

로사가 오물오물 음식을 먹는 것을 보는 것은 꽤 마음이 푸근해지는 일이었다. 떠올려보면 전에도 그녀는 음식을 먹으며 감탄을 많이 했었다.

먹을 것에 약한 건가? 헨리는 철벽에 가까운 약혼녀의 약점을 하나 발견한 것 같아서 신이 났다. 앞으로 로사에게 보낼 선물의 리스트에 몇 줄 더 추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