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죄 없는 이가 죄를 잇고 악연이 대물림하는구나.”

악연을 끊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까요? 그 누구도 다치지 않고 매듭지을 수 있을까요?

남들에겐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는 것도 들리는 저는 ‘비나리’예요. 까치울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나에게 어느 날 부모라는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모두들 말렸지만 저는 그들을 따라가기로 했어요. 업을 마치고 엉킨 매듭을 끊기 위해……

- 달콤한 미끼가 되어주시오. 온갖 것을 끌어드리리다. 좋은 것, 나쁜 것. 탐욕스러운 것, 바닥을 기는 것, 옴 붙은 것, 길흉화복 가리지 않고 그대에게 들러붙겠지.

“위험한 일인가요?”

- ……그렇소.

“미끼, 할게요.”

- 예상한 대로이나 그대는 참으로 겁이 없군.

“제가 죽으면 아저씨가 데리러 온다는 약속은 그대로인가요? 그거면 되었어요.”

2. 작가 소개

정연주

최근에 거주 환경이 집필에 최적화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 좋고 공기 좋은 시골! 흉흉한 소문과 소문보다 더 빡빡한 막차 시간! 덕분에 외출도 어렵고 해서 집필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 삼박자 떨어지는 곳이 어디냐면 화성입니다. 화성(星) 말고 경기도 화성.

……위험하지 않냐는 지인의 질문에 이렇게 대처하고 있습니다. 그냥 시골이라 제철채소가 참 맛있다고요(웃음).

▣ 출간작

기화, 왕의 기생들

야수의 청혼

인어의 목소리

캔버스 위의 당신

붉은 매듭

도깨비 각시

가희 사랑할지어다

달빛을 밟는 아씨

어드레스

플러스 플러스 마이너스

헤스키츠 제국 아카데미(공저)

차아제국 열애사(공저)

허니 앤 베어(공저)

하늘 창(공저 단편집)

겨울 엔딩(공저 단편집)

마음을 낚는 이야기꾼 웹소설 작가 되기(공저)

3. 차례

1부

#하나. 비나리의 하루

#둘. 옛살비

#셋. 소소리바람

#넷. 꽃눈개비

#다섯. 배알티

#여섯. 해뜩

#일곱. 살여울 가운데 솟대

#여덟. 누르 삼키듯

#아홉. 마음밭

#열. 으밀아밀

#열하나. 서털구털

#열둘. 가을 갈대

#열셋. 한숨에 흔들리는 살매

#열넷. 먹이잡이

#열다섯. 저이는 안 돼

#열여섯. 자귀

4. 미리 보기

- 그대.

비 내리는 소리에 그의 목소리가 섞여듭니다. 전혀 젖지 않는 새카만 도포가 장막처럼 펼쳐져요. 우산을 뒤로 살짝 젖혔습니다. 비가 콧잔등과 뺨에 튀었지만 다시 앞으로 기울이고 싶지 않았어요. 가까이서 본 아저씨의 턱은 재미있게 생겼거든요. 못생긴 게 아닙니다. 그저 아저씨의 모든 것이 제게 새로울 뿐이지요. 무겁게 가라앉았던 마음을 단숨에 올려놓을 듯이.

- 죽음이 무섭지 않소?

“삶은 항상 죽음과 함께하는걸요.”

늘 목숨 아까운 줄 알라는 그의 말투가 아니었습니다. 확인하는 것 같았어요. 고개를 갸웃하며 고개를 더 들었어요. 빗방울이 치마 끝을 적시고 속눈썹에 대롱대롱 매달립니다. 그의 입가가 기묘하게 올라갔습니다.

- 내 재미난 것을 보고 왔소.

퍽, 부드러운 목소리.

- 어찌나 흥미롭던지 관여하지 않고서 견딜 수 없을 정도이지.

그러나 그는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도 그윽한 오얏꽃 향기가 퍼집니다. 그 사이에서 비릿한 피 냄새를 맡았어요. 수없이 덧칠해서 썩어 문드러진 냄새. 처음으로 그가 저승차사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느껴졌습니다. 풀도 벌레도, 비가 내리는 소리조차 숨을 죽이고 아저씨의 분노에 몸을 사렸어요.

- 제안할 것이 있소.

창백하고 길쭉한 손끝이 제 턱을 들어올립니다. 가까워진 거리. 그의 넓은 갓 아래 저 역시 들어가게 되었어요.

- 달콤한 미끼가 되어주시오. 온갖 것을 끌어드리리다. 좋은 것, 나쁜 것. 탐욕스러운 것, 바닥을 기는 것, 옴 붙은 것, 길흉화복 가리지 않고 그대에게 들러붙겠지.

기이한 경험이었습니다. 아저씨의 품에 안기듯, 그의 갓 아래 들어왔음에도 저는 고스란히 비를 맞았어요. 저승의 사람과 이승의 사람이라는 걸 가르듯이. 하지만 그 경계가 흐릿하게 뭉그러집니다. 찰랑찰랑 새카만 물이 차올라요. 비가 내리는 소리 역시 멀어집니다.

- 그러다가 마지막의 마지막. 썩지도, 삭지도 못할 추악한 것까지 끌려오거든…….

삭지도 못하는 것. 어느 날. 어머니의 뱃속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귀신이 우렁우렁 외치며 그이를 욕했던 말이었습니다. 아저씨도 혹시 그를 알고 있는 걸까요?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다가 손을 잡았습니다. 아저씨의 손은 온기라고는 조금도 없었어요.

“위험한 일인가요?”

움찔. 아저씨의 표정은 담담하였으나 그의 손은 달랐습니다.

- ……그렇소.

약간의 갈등이 목소리에 묻어났습니다. 아저씨가 뭘 원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어요. 하지만 그가 바라는 끝에, 그이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목숨. 목숨이라. 아저씨가 원하는 미끼란 남자애 수준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더 지독하고 생사의 갈림길에 수없이 오를지도 몰라요. 터무니없이 위험한 일입니다. 참으로 터무니없으나.

“할게요.”

선뜻 동하는 건 왜일까요.

“미끼, 할게요.”

- 예상한 대로이나 그대는 참으로 겁이 없군.

“제가 죽으면 아저씨가 데리러 온다는 약속은 그대로인가요?”

- …….

“그거면 되었어요.”

아쉬움을 참고 아저씨에게서 떨어졌습니다. 멀어졌던 빗소리가 가까워집니다. 까맣게 차올라 흐리기만 하던 물 위로 파문이 생겼어요. 참방. 참방. 허물어졌던 경계가 다시 세워지고 빗방울이 다시금 종아리에 튀었습니다.

흐릿하였던 세상이 또렷해져 저 멀리 현관이 나타났어요. 아저씨에게서 등을 돌려 현관문만 똑바로 보고 걸었습니다.

- 이상한 사람.

언뜻 투덜거림이 들려 뒤돌아보았지만, 이미 그는 사라진 뒤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