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통 풍선을 안 불어 주나 보군.”
순간 남자의 말에 미영은 급체한 사람처럼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그것은 분명 자신의 풀썩 꺼진 마른 엉덩이를 두고 하는 말임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사이코, 변태 자식! 학교 다닐 때도 날 놀려 먹더니, 이 나이에 또 놀려 먹어.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하필 저 놈이랑…….’
강재민! 분명 너, 그 강재민이 분명해. 모습이 많이 변해서 긴가민가했지만 너의 킹콩 웃음만은 내가 알아들을 수 있지. 분명 너는 나를 말라깽이 이쑤시개라고 불렀던 그 놈이야.

부스스한 단발머리, 이쑤시개처럼 깡마른 여학생. 그 말라깽이 이쑤시개가 그녀라니. 지금의 미영은 윤기 흐르는 긴 생머리에 얼굴은 동안대회에 나가도 좋을 만큼 상큼했다. 미영의 엉덩이를 바람 빠진 풍선이라고 놀려대긴 했지만 그녀의 마른 체형은 그녀를 소녀처럼 보이게 했다. 재민은 자신과 동갑임에도 불구하고 소녀처럼 귀엽고 청순해 보이는 그녀에게 자신도 모르게 끌리고 있었다.


미영은 풀린 눈으로 말없이 유리문에 비쳐진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흐트러진 자세로 쿠룬타에 엎드려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이 모습이 섹시하다고? 미영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제멋대로 뻗어 내린 흐느적대는 팔, 헬륨을 불어넣은 풍선처럼 금방이라도 허공에 뜰 것 같은 엉덩이. 이런 자세가 섹시하다고? 그럼 엉덩이를 좀 더 치켜들고 그를 향해 살짝 흔든다면?


“저기, 옆자리 빈자리인가요?”
차분하면서도 정중한 남자의 목소리가 미영의 귀를 자극했다. 미영은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긴 팔을 의자 등받이에 걸친 등산복 차림의 남자가 그녀의 머리를 덮칠 듯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남자의 땀 냄새가 풀냄새처럼 풍겨 왔다. 남자는 긴 웨이브머리를 뒤로 묶고 있었다. 남자는 자연스러우면서도 터프하게 생겼다.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거나 락 가수처럼 열정적인 노래를 부르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스토커……그래, 나 미쳤어. 잘나가는 서해진이 남자 하나 사랑해서 완전히 병신 됐어. 그런 내 인생이 어떤 건지 네가 알아? 나라고 자존심 없어서 그런 줄 아니? 넌 죽었다 깨어나도 내 심정 모를 거야. 날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 날 사랑하게 만들려는 내 마음 네가 알기나 해? 나도 이러는 내 감정 지겹도록 싫어. 하지만 그 사람 아니면 안돼는 걸 어떡해! 내 결혼생활 악몽이었어.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살 거야.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까 그렇게 살고 싶어. 난, 그와 꼭 결혼하고 말거야. 악마와 손을 잡고서라도 그를 쟁취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어. 너 따위, 나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야!”

재민은 그녀가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자동차에 키를 꽂고 와이퍼를 작동시키고 있었다. 비가 자동차의 앞 유리를 통째로 씻어 낼 만큼 세차게 내렸다. 와이퍼가 뻑뻑 비명을 내지르며 심하게 좌우로 움직였다. 그는 홧김에 자동차에 키를 꽂았지만 그녀가 뒤따라와 그런 자신을 말려 주길 내심 간절히 바랬다. 그래서 차안이 좀 답답하다고 느낄 만큼의 시간이 흐를 때까지 재민은 금방 차를 출발 시키지 않았다. 이대로 홧김에 떠나 버리면 그녀와 이대로 끝장나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