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그렇게만 웃어줘.”

수석은 도맡아놓았고, 용모 수려해, 집안 빵빵해, 모두가 동경하는 히렌 가의 공자님 카이츠 아일 히렌. 그런 그에게 적대감을 품은 유일한 여자사람 아란 지는, 성실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헤스키츠 제국 아카데미의 만년 차석이다. 하지만 아란이 저를 어떻게 보든, 저에게 뭐라고 하든 히렌에겐 병아리가 삐약대는 걸로밖에 안 보인다.

히렌을 타도하겠다는 목표로 보낸 아란의 6년 세월. 아카데미의 졸업반에 들어선 그들의 질긴 인연은 조금씩 그 색깔을 달리하기 시작하는데…….

아란이 손을 살래살래 흔들고 저만치 가버린다.

카이츠는 저도 모르게 뻗은 손을 애써 다잡았다.

“병아리는 정말 무방비하다니까.”

피붙이가 아닌 남자가 여자에게 비녀를 선물해주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뿐이다.

구애.

그대를 마음에 두고 있으니 알아달라는 구애의 선물.

2. 작가 소개

정연주

최근에 거주 환경이 집필에 최적화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 좋고 공기 좋은 시골! 흉흉한 소문과 소문보다 더 빡빡한 막차 시간! 덕분에 외출도 어렵고 해서 집필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 삼박자 떨어지는 곳이 어디냐면 화성입니다. 화성(星) 말고 경기도 화성.

……위험하지 않냐는 지인의 질문에 이렇게 대처하고 있습니다. 그냥 시골이라 제철채소가 참 맛있다고요(웃음).

▣ 출간작

기화, 왕의 기생들

야수의 청혼

인어의 목소리

캔버스 위의 당신

붉은 매듭

도깨비 각시

가희 사랑할지어다

달빛을 밟는 아씨

어드레스

헤스키츠 제국 아카데미(공저)

차아제국 열애사(공저)

허니 앤 베어(공저)

하늘 창(공저 단편집)

겨울 엔딩(공저 단편집)

마음을 낚는 이야기꾼 웹소설 작가 되기(공저)

양효진

1989년 3월, 절과 돌탑, 왕릉이 많은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책읽기를 좋아하긴 했지만

소설을 쓰기 시작한 건 대학교에 들어온 이후.

그 전에는 남들처럼 먹고, 자고, 공부하는 평범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라는 부모님의 말씀에

충실한 지금이 만족스럽답니다.

현재 대한민국 어딘가에 있는 해가 잘 들어오는 집에서

매일매일 마감에 쫓기는 삶을 사는 중.

▣ 출간작

엘샤 꽃나무 아래에 앉아서

계약의 목걸이

너의 온기에 안기다

눈부신 그대

파란만장 태자호위담

그는 내 심장을 뛰게 한다

내 꿈으로 놀러 와요

아이고, 폐하!

헤스키츠 제국 아카데미(공저)

차아제국 열애사(공저)

허니 앤 베어(공저)

마음을 낚는 이야기꾼 웹소설 작가 되기(공저)

하늘 창 (공동저작 단편모음집)

겨울엔딩 (공동저작 단편모음집)

3. 차례

#20. 갈림길에 도착하다

#21. 아카데미판 국회 개회

#22. 아카데미판 국회 진행

#23. 아카데미판 국회 폐회

#24. 폭풍이 오기도 전에 아수라장

#25. 야식 조달 대작전

#26. 폭풍 지나가니 태풍 온다

#27. 종이 한 장이 방학을 판가름하지

#28. 자개나비는 까만 비단 위에만 앉는다

#29. 장소가 바뀌어도 하는 일은 똑같다

#30. 누구를 위한 전화위복인가

#31. 바다와 휴양과 너

#32. 결국 남은 건 삐약삐약

#33. 정리, 정리, 정리

#외전 3. 흑심을 박아 넣다

#외전 4. 가장 눈부신 계절

4. 미리 보기

“맛있어!”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머리에 반짝반짝거리는 비녀를 꽂은 아란은 냠냠 소리를 내며 젤리를 먹었다. 요리장이 예술혼을 불태우며 만들었다는 여러 가지 맛의 젤리들이 쉴 새 없이 아란의 입안에 쏙쏙 들어갔다.

“이건 달달한데 담백하고. 새콤한 것도 맛있어!”

카이츠는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그런 아란을 지켜보았다. 일부러 젤리가 미지근해지지 않도록 차갑게 식힌 보람이 있었다. 오물거리며 병아리는 행복해하고 있었다.

동그란 볼이 살짝 부풀면서 작은 손이 바삐 움직였다. 역시나 자신은 이 모습이 보고 싶던 거다. 기운 없는 것이 아니라, 방실방실 웃는 얼굴.

“병아리, 차아제국에서 비녀를 남자가 여자에게 선물하는 뜻을 알고 있어?”

“아움, 응?”

“아니야, 아무것도.”

요즘 거의 먹지 못했던 아란은, 공작가 최고 요리장의 젤리에 흠뻑 빠져 카이츠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카이츠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아란에게 젤리를 더 먹으라고 권했다. 손에 젤리가 담긴 잔을 쥐어 주자 까만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며칠 동안 기운 없던 병아리가 다시금 삐약삐약거리며 모이를 먹자 그 모습을 보는 카이츠의 배가 다 부른 것 같았다.

예전에도 여러 간식을 알게 모르게 챙겨줬지만 이번이 가장 잘 먹히는 것 같다. 하지만 카이츠는 이 과일젤리를 자주 아란에게 주지는 않을 것이었다. 맛있는 간식은 자주 주는 것보다 어쩌다 한번 주는 것이 더 잘 먹히니까. 마치 사람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것처럼.

기운을 회복한 아란은 카이츠의 병아리 운운에도 별로 화를 내지 않았다. 아마 분노보다 고마움이 더 큰 것 같았다. 기분도 좋아 보이고. 카이츠는 아란에게 기운을 차려서 다행이라는 말을 하며 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었다.

“헤헤.”

어린아이처럼 웃는 너.

그 웃음을 잃을까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모를 것이다. 그때, 소렌에서 넘어져 울먹이던 아란의 표정이 카이츠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마 그 표정을 카이츠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슬픔으로 얼룩져 있던 눈망울은 아직도 그의 가슴을 묵직하게 누르고 있었으니까.

“그렇게만 웃어줘.”

“응?”

“삐약거리지 않는 병아리는 아픈 병아리뿐이야. 기운 내라고.”

“어, 기운 났어. 고마워. 비녀를 고쳐준 것도. 맛난 젤리를 준 것도.”

붉은빛이 도는 입술이 조물조물 사랑스러운 말을 만들어낸다. 그는 순간 멋대로 움직이려는 몸을 초인적인 이성으로 막았다. 여기서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버린다면 비녀를 고쳐주고 젤리를 먹인 것이 전부 헛수고가 된다. 병아리가 순식간에 맹금류인 매로 변해서 그를 사정없이 쪼아댈 것이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주먹을 꾹 쥐어 제정신을 차린 다음 간신히 대답했다.

“그 고마운 마음, 잊으면 안 된다.”

“응, 알았어. 절대 안 잊을게.”

절대 잊으면 안 돼, 라고 강조한 그는 씩 웃으며 아란의 머리카락을 다시금 쓰다듬었다. 이번에도 손을 밀치지 않는 것이 정말 기분이 좋은 듯했다. 힐끔 카이츠의 시선이 아란의 머리카락으로 향한다. 비녀가 반짝거리며 빛났다. 조각났다가 다시 이어진 자개장식은, 조각조각 났기 때문인지 빛을 받을 때마다 쪼개져 그 빛이 사방으로 반사되었다. 마치 지금 아란의 기분처럼. 하지만 그것보다 카이츠가 마음에 든 것은 가운데에 박힌 자수정이었다.

“이만 반으로 돌아갈게. 고마웠어.”

아란이 손을 살래살래 흔들고 저만치 가버린다. 카이츠는 저도 모르게 뻗은 손을 애써 다잡았다. 그러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병아리는 정말 무방비하다니까.”

아마 아란이 차아제국에서 자랐더라면 결코 카이츠가 제게 이만큼 다가가게 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차아제국에서 여자의 머리카락이란 친인척과 남편 외의 남자는 만질 수 없었다. 더불어 그런 머리카락을 장식하는 장신구 역시, 아무나 선물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피붙이가 아닌 남자가 여자에게 비녀를 선물해주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뿐이다.

구애.

그대를 마음에 두고 있으니 알아달라는 구애의 선물.

그리고 그 남자의 마음을 받은 여자는 알았다는 화답의 표시로 비녀를 머리에 꽂는다. 그것이 차아제국의 전통이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비녀에 가문이나 자신을 대표하는 증표를 박는다면 의미가 더 깊어진다. 남자의 가문의 증표가 든 물건을 지닌다는 것은 그 집안의 식구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마 아란이 원래 갖고 있던 그 비녀의 청녹라도 그런 의미의 물건이었을 것이다. 아란의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청혼의 의미로 받은 것이었을 터다.

“무방비한 것도 모자라 무관심이랄지.”

차아제국에서 조부 때 이민을 와 벌써 3대째. 이민 3세대인 아란은 차아제국의 문화를 전부 다 알지는 못한다. 잊지 않기 위해 신경 써 가르치고, 그것을 후손들이 잘 지킨다고 해도 이런 은밀한 남녀 사이의 일까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카이츠로서도 이번에는 조금 김이 샜다. 비녀의 의미는 몰랐어도 그 가운데 박힌 보석의 의미는 좀 알아봐줬으면 좋았을 텐데.

“아란 지. 까만 병아리. 정말 둔해.”

자수정의 의미는 정조, 성실, 평화를 사랑하는 것. 자수정은 먼 옛날, 황족과 귀족만이 착용했다는 귀한 보석으로 흔히 상대방이 건강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선물하던 보석이었다. 하지만 카이츠가 아란에게 준 것은 전혀 다른 의미.

“자수정은 내 보석이야.”

그의 생일은 추운 겨울인 2월이었다. 그리고 2월의 탄생석은 자수정. 바로 카이츠의 보석이다.

이제부터 아란의 머리카락에는 카이츠의 탄생석이 박힌 비녀가 무방비하게 장식될 것이다. 평생을 아끼며 달고 다니겠지. 카이츠의 탄생석을 단, 그 비녀의 의미조차 당분간 모른 체.

“그 의미를 언젠가 네가 알아채기를.”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아란이 비녀의 의미를 알고, 아란에게 향한 그의 마음을 알기까지. 그날이 부디 너무 멀지는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흑심을 오랫동안 숨기는 것도 꽤나 힘든 일이니.

“쪼아봤자 약간 따끔할 뿐이야. 그리고 화, 그렇게 심하게 내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 어떤 해도 끼칠 수 없는 작고 연약한 동물이지.”

토미는 진지하게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 자기가 보기에 그가 병아리라 부르는 그녀는 일단은 훌륭하게 자란 숙녀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주름이 적은 치마도 그렇고 활짝 웃는 얼굴도 그렇고. 하지만 남들과 다른 자신의 친구는 아무래도 저 모습이 그저 병아리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눈이 아픈 건 아니지? 누누이 묻는 거지만.”

“내 눈은 아주 멀쩡해. 토미, 네 눈이 이상한 거지.”

졸지에 이상한 눈을 가진 사람이 되었지만 토미는 별 상관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신사적이고 예의가 바르지만 그것이 아주 두껍고 튼튼한 가면이라는 걸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툭툭 내뱉는 말이 나오면 진심인 것이었다.

“하여간 난 몰라. 난 너의 병아리가 무섭다. 아카데미의 차석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그러니 이름도 제대로 부르고 미움도 안 사게 조심할 거다.”

단순한 토미는 결국 자기 혼자만 쏙 빠져나가는 걸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진정한 친구라면 좀 더 설득을 하든지 말을 하겠지만 격투기와 검을 전공하는 그로서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