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상처란 살아 있는 생명체 모두에게 언제고 생겼다가 치유되죠. 재미없는 말 그만하고 날 사랑한다고 말해요.”
스물네 살,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버린 명희. 그녀의 앞에 나타난 청년 석주는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만, 명희에게 석주는 동화 속 왕자님일 뿐이다.
언제나 착하게 살아왔지만 그녀에게는 너무나 가혹했던 세상. 결국 명희는 자신의 착함을 무기로 세상과 맞서기 시작하고, 석주 역시 자신의 힘을 키우며 그녀를 기다리는데…….
“너무 기다리게 하진 말아줘요. 착하게 살고 싶으니까요.”
한참 만에 고개를 돌린 나는 그렇게 말했다.
“내가 잠시 미친 적이 있다고 했죠? 방금 그 이유를 알았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품고 싶어도 못 품으면 사람이 미치더군요. 착하지 못하게 말이죠.”
호기심을 쫑긋 세우고 듣던 그녀가 엷은 웃음을 지으며 묻는다.
“지금 석주 씨 기분은 어떠세요?”
“정화된 기분입니다.”
어느 나무에서 비를 피하는 중일까. 살바람에 실려 새소리가 날아든다. 나는 새소리보다 청아한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나무를 닮은 그녀를 향해 귀를 기울였다.
2. 작가 소개
솔겸
1월 13일생.
여러 형태의 음식 로맨스를 준비하는 중.
▣ 출간작
변두리 소나타
3. 차례
#01. 소리
#02. 명희
#03. 석주
#04. 명희
#05. 소리
#06. 석주
#07. 영철
#08. 명희
#09. 영철
#10. 석주
#11. 영철
#12. 석주
#13. 소리
#14. 석주
#15. 영철
#16. 석주
#17. 명희
#18. 석주
#19. 명희
#20. 석주
#21. 명희
#22. 석주
#23. 영철
#24. 소리
#25. 석주
#26. 명희
#27. 석주
#28. 소리
#29. 명희
#30. 석주
#31. 명희
#32. 석주
#33. 명희
#34. 영주
4. 미리 보기
안개처럼 부옇게 내리는 보슬비로 밤이 빨랐다. 네온사인이 켜지는 거리를 바라보며 나는 공연히 어깨에 멘 가방을 뒤적거리며 해찰했다. 출근길을 나설 적에는 아침 햇볕 사이로 간간이 떨어지는 여우비였기에 우산을 굳이 챙기지 않았다.
“애매하네.”
우산을 사기도, 그냥 걷기도 애매한 빗줄기다. 물기에 찰싹 달라붙는 얇은 블라우스만 입지 않았어도 선선히 감당할 수 있는 비였다. 한국건설 사옥의 콘크리트 추녀 밑에서 중얼거리는 나의 말을 누군가 받는다.
“애매하긴 하네.”
굵직한 목소리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훤칠한 키에 네모 길쭉한 얼굴의 부사장이다.
“가져가.”
사양할 틈도 없이 내 손에 노란색 장우산이 들려진다.
“저기요, 부사장님.”
나는 손을 뻗었다. 그의 하늘색 반팔 와이셔츠로 손가락이 닿는가 싶더니 허공을 찌르고 만다. 어느새 그는 돌아서서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얼굴이 익은 직원들이 와글와글 퇴근길을 나서는 중이다. 스무 살의 젊은 여자가 서른네 살의 부사장을 업무의 연장이 아닌 일로 붙잡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을 듯싶어 나는 휙 몸을 돌렸다.
골프 로고가 그려진 우산은 퍽이나 컸다. 게다가 숨을 죽인 바람 탓에 몸 어디도 젖지 않았다. 대신에 몸에서 나온 땀이 옷을 적신다. 왜 그는 우산을 들고 내 뒤에 서 있었을까. 달콤한 호기심을 곱씹으며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전철을 탄 뒤 접은 우산을 짚고 섰다. 단단한 지팡이 같다. 부사장의 단단해 보이는 가슴이 생각난다. 그가 곁에서 지켜주는 듯싶다. 옷에 밴 땀이 마르면서 까슬까슬한 소금기가 몸을 간지럽게 한다. 그리고 우산을 잡은 손에서 시작된 수상한 온기가 가슴을 간질간질 쓸어댄다.
장대비가 내리던 지난주에는 전철역까지 차를 태워주었던 그다. 우산을 가져오지 않고 비를 만나는 두 번의 시간에 그의 신세를 졌다. 나는 생각했다. 우연이 아니다. 이따금 구내식당 조리실로 음료수 봉투를 건넸던 그의 친절도 사실은 나에 대한 관심으로 해석하고 만다.
회사와 원룸의 중간 지점의 전철역에서 내렸다. 대로를 걷다가 좁은 길로 들어서자 붉은 십자가 네온 옆으로 초여름의 일터였던 커피숍 간판이 덩덩그렇게 떠 있다. 주택을 개조해 만든 커피숍이다. 시나브로 어둠이 깊어지는 작은 길은 추적추적 내리는 비로 사뭇 을씨년스럽다. 빌딩을 올린다며 주변 집들을 밀어버린 탓에 밤에 보면 커피숍은 황무지에 덩그렇게 솟은 상가처럼 보인다.
나는 태연하게 커피숍 안으로 들어갔다.
“김소리?”
삼십 대 중반의 주인남자가 작은 눈을 치뜨며 반색했다.
“안녕하세요. 약속이 있어서요.”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키친 구역 바로 앞 테이블을 차지했다. 연인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서너 테이블을 차지할 뿐 가게는 한산했다. 조만간 이곳도 철거될 터였다.
“약속이 있다고?”
주인남자의 얼굴로 짧은 순간 여럿의 표정이 교차한다. 그의 곁으로는 나보다 한두 살 많아 보이는 여자가 커피를 내리고 있다. 엷은 화장기와 순박한 모습. 주인남자가 선호하는 스타일이다. 주인남자가 몸을 내밀 때 여자 직원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짚었다. 여자는 당황하지 않았다. 나는 쓴웃음을 삼켰다.
“예. 남자친구 만나기로 했어요.”
나는 한참을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껌을 씹듯이 입 안에 오물거리다가 단물 빠진 껌처럼 뱉어낸 말이었다.
“흠. 남자친구?”
너털웃음을 흘리고 주인남자는 비로소 시선을 돌린다. 그의 시선을 따라 출입문을 보니 우람한 체구의 스무 살 남자가 힘차게 문을 밀고 들어선다.
“가게가 기기묘묘해. 멸망한 지구에 최초로 세운 것 같다.”
백호민이 넙데데한 얼굴을 내게 바짝 내밀고 속달거렸다.
“폐허 속에 핀 꽃이야.”
나는 따뜻한 램프가 줄줄이 박힌 천장을 가리키며 대꾸했다. 호민이 머리카락에 스며든 빗물을 털어내고 손가락으로 가리마를 잡는다. 축구선수를 꿈꾸었다가 조리학과를 선택한 호민은 여름방학 동안 그의 부친이 운영하는 묘묙장에 내려가 있었다. 한 달 만에 보는 그는 탐스러운 구릿빛 피부를 만들어 왔다.
“진즉 알려줬음 내가 와서 도왔을 텐데.”
커피숍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과 친구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젊은 여자가 가져온 커피를 마시면서 호민이 번쩍 고개를 든다.
“참, 소리 너 지금은 구내식당 일 한다며?”
방학을 맞이하여 한국건설 구내식당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비로소 학우들에게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응. 엄마가 소개했어. 방학 땐 아줌마 한 분이 애들이 어려서 못 나온대.”
“임시직 같은 것?”
“그런 셈.”
“지겹겠다.”
조리학과 학생들은 의뢰로 식당 아르바이트를 기피했다. 차라리 편의점 등의 아르바이트 자리를 원했다.
“월급이 많아. 속도 편하고.”
“여긴 보수가 적고 속이 불편했니?”
호민이 풋, 웃으며 주인남자를 힐긋 보았다. 나는 주인을 쳐다보지 않은 채 태연하게 대꾸했다.
“돈 많이 준다고 집적대는 아저씨가 있긴 했어.”
“뭐!”
호민의 얼굴이 단박에 붉어진다. 솥뚜껑만 한 주먹을 움켜쥔다.
“어떤 새끼가?”
“유부남이었어.”
“그래서, 그래서 어떡한 거야!”
“급소를 냅다 지르고 도망쳤어.”
“이런 썅! 나한테 연락하지 그랬어?”
“지난 일이야. 나중에 찾아와 급소 터졌다고 치료비 달라 할까 봐 그만둔 거야. 덕분에 더 좋은 자릴 얻은 거지.”
갸웃하며 주인남자를 힐긋거리던 호민이 이내 움켜쥔 주먹을 풀어낸다.
“그럼 호사다마인가?”
“응. 전화위복이라고도 하지.”
“그래, 그래. 다사다난했어도 자리 잡아서 다행이다.”
쉬운 말을 어렵게 하려고 티를 내는 그의 유치한 행동거지에 나는 기분이 울울했다. 평소에는 순박해서 기분 좋았던 행동거지가 얄밉게 와 닿는다. 이제는 그가 어른스러웠으면 좋겠다.
“나잇살 먹은 아저씨들은 왜 그런지 모르겠다.”
수컷인 호민이 불퉁거렸다.
“불편한 이야기를 해서 미안해.”
나는 정말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소곳이 변명했다.
“아냐. 잘 그만뒀다. 여긴 동네가 어째 으스스하더라. 여자가 일하긴 위험해 보여. 카페도 언제 철거될지 모르니 등하불명이고.”
“응. 풍전등화라고도 하지. 사실 여기가 무서워서 시급도 오늘에야 받으러 온 거야.”
“걱정 마라. 이 백호민이 있잖아. 그 양아치 아저씨 오늘 나타났음 좋겠다, 썅.”
“호민아, 오랜만인데 우리 기분 좋게 커피 마시자.”
“알았다. 암튼 나한테 연락해서 고맙다, 나의 지기.”
“난 미안한데?”
“남자가 고맙다고 하면 그런 줄 알지, 뭘 따지니.”
나는 두 손으로 잔을 그러쥐고 커피를 홀짝거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더니 주인남자가 곁에 서 있다. 호민과 하는 이야기를 죄다 들었으리라.
“계좌번호를 안 적어놓고 가서 송금 못했어.”
주인남자가 흰 봉투를 건네주었다. 나는 봉투 속의 금액을 확인하지 않고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해요, 사장님.”
호민이 문득 주인남자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날린다. 주인남자는 움찔하며 돌아섰다. 주인남자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알아차리고 나는 비웃음을 삼켰다. 한 달 전 갑자기 이곳에 발길을 끊었지만 시급은 받아야 했다. 돈이 썩 궁한 것은 아니었지만 안 받을 명분도 없었다.
커피숍을 나오자 축축하게 젖은 밤 저편으로 네온사인이 무더기로 떠 있다. 호민을 이용했다는 죄의식에 나는 저쪽의 번화가를 가리켰다.
“술 한잔 어때? 내가 사고 싶어.”
호민이 반색하다가 갸웃한다.
“소리 너도 술 하니?”
오리엔테이션 이후 술을 마신 적이 없다. 아르바이트 때문이었다.
“응. 나도 어른이잖니. 알고 보니 내 술독이 꽤 크더라.”
호기를 부렸지만 일찍 취한 쪽은 나였다.
“난 말이지. 엄마하고 생각이 달라. 몸은 줘도, 마음은 아무한테도 못 줄 것 같거든.”
생뚱맞은 말을 술기운에 담아 풀어내자, 호민의 볼이 단박에 붉어진다.
“소리야. 우리 둘, 마음이 잘 맞지 않니?”
“미안해. 사서 고민하는 바람에 아무도 사귀지 못하나 봐.”
그를 이용했다는 죄의식에 더해 그의 앞에 앉아 우산의 주인인 부사장을 생각하고 있는 나를 깨닫고 그렇게 변명했다.
“어떻게 하면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남자하고 자봐야 애송이를 벗어날까?”
아차, 했지만 이미 흘린 말이 되었다. 당돌한 내 말에 호민이 안절부절못해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런데 호민이 너 겪을수록 참 순수한 사람이더라.”
“언제는 영웅호색이니, 바람둥이라고 놀리더니, 참.”
“아니. 넌 순수해. 바람둥이는 나야. 육체가 순결하면 뭐하니? 마음이 불순한데.”
“소리야.”
“암튼 나한테 부지런히 작업 걸어줘서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몸은 몰라도 마음은 어려울 것 같아.”
“미상불, 쬐끄만한 여자가 참 복잡하게 사네.”
툴툴거리면서 어색한 마음을 다잡는 양 애써 어깨를 편다. 그런 그를 바라보면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내가 생각해도 그래. 난 참 대책 없는 여자야.”
지겹게 그어 내리는 부슬비 때문일까. 저녁 내내 마음이 심란하다. 나보다 더 어린 생각을 가진 호민이 시종 얄미웠고,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못마땅했다. 문득 나는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이 어쩌면 순결 때문이라고, 순결 때문에 인생의 풋내도 지울 수 없고, 운신의 폭도 좁아졌다고. 대책 없이 무너지고 싶은 여자의 의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민은 반듯한 청년의 모습으로 휘청거리는 나를 원룸까지 바래다주었다.
“추태 보여서 미안하다.”
“아니. 고맙다. 소리 넌 날 믿어주었잖니.”
“내가?”
“응. 믿으니까 순진무구 네 속마음 내려놓은 거 아니니?”
그가 커다란 우산 속을 벗어나 밤하늘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난해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그런데 난해한 말을 해주는 네가 그냥 고맙더라.”
미안하다는 말을 삼키며 조용히 나는 우산을 접고 원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몫의 사각형 공간에 들어가 휘뚝거리는 다리를 바로 세우며 달력을 보았다. 어쩐지 기분이 찝찝하다 했다. 엄마의 생일도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바로 내일이다. 갓 자정이 넘었으니 오늘이다. 딱 지금의 내 나이, 스무 살에 엄마가 된 여자의 생일이다. 선물을 발송하기엔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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