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이렇게 간청드립니다, 대공 각하. 저를 각하의 부인으로 맞아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정부인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디야 제국의 2황녀 세이레이아. 검은 숲의 맹약을 맺기 위해 그녀와 영혼의 쌍둥이인 이세계(異世界)의 정예연을 불러냈다.
외모 빼고는 닮은 구석을 찾기 힘든 두 사람인데, 중원에서 거칠게 살아가던 예연이 과연 황녀의 대역을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리고, 세이레이아로부터 넘겨받은 기억 중 이 모멸스럽고 수치스러운 장면은 무엇이지?
“대공 각하.”
“이제는 이름을 불러도 되는 사이지 않습니까?”
“……그게 익숙하지 않아서요.”
“익숙해지도록 하십시오. 저도 마마라는 호칭 대신 세이레이아 님이라 부를 테니까요.”
2. 작가 소개
김경미
2002년 『그린 핑거』로 데뷔했다. 같은 해 『카사블랑카』를 시작으로 『야래향』, 『노란 우산』, 『청애』, 『눈 노을』, 『위험한 휴가』, 『매의 검』, 『화잠』, 『어긋난 휴가』를 냈다.
3. 차례
#사냥대회 (4)
#파르혼 족
#드래곤 산맥
#애심(愛心) (1)
4. 미리 보기
‘킨?’
세이레이아가 귀걸이에 있는 정령을 불렀다. 길게 늘어진 귀걸이의 붉은 루비가 환하게 빛나다 약해지길 반복했다.
‘킨? 킨!’
당장 응답할 줄 알았는데 답이 없다. 세이레이아는 답답해 제 귀에 걸려 있는 귀걸이를 거칠게 잡아 뺐다.
당장 바닥으로 던질 듯 손을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불친절한 안내인을 떼어버릴까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그때 아슬아슬하게 귀걸이가 빛나기 시작했다. 깨어질 위기를 아는 듯 붉은 섬광을 연신 번득거렸다.
『잠, 잠깐!』
다급한 외침에 한껏 들려 있던 세이레이아의 손이 멈췄다.
『멈춰라! 사타나르 님의 메시지를 가져왔다! 그분과 연락하느라 잠시 답을 할 수 없었단 말이다!』
세이레이아가 혀를 찼다.
‘정말, 별 도움이 안 되는군. 그런 건 동시에 처리할 수 없어?’
『너라면 두 장소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겠나? 아무리 나라도 날 둘로 나눌 수는 없는 법이다! 그건 불의 정령왕인 샐리온 님도 못 하시는 일이다!』
킨은 억울한 마음에 악을 썼다. 귀걸이가 깨지면 머물 곳을 잃어버린 그는 정령계로 강제귀환하게 될 터고,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사타나르가 뭐라고 했지? 설마, 우리가 찾아갈 때까지 안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겠다는 건 아니겠지?’
되묻는 어조에 짜증이 가득했다. 생각을 잘못했다.
세이레이아는 내키지 않지만 자신의 계산이 잘못됐다는 걸 인정했다. 지도로만 본 탓에 사타나르가 있는 드래곤 레어까지 가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나 거리를 잘못 계산한 것이다.
에반과 조안이 없다면 더 빨리 움직일 수는 있겠지만, 이제 와 그 둘을 떼어놓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카타하르가 말한 것처럼 남부로 내려간 행렬을 빨리 뒤쫓아 빈자리를 채워야 했다.
여유 있던 시간은 벨지안에서의 뒤처리를 하느라 까먹었다. 드래곤 산맥 초입에 마틴을 떨구고 온 것도 채 지우지 못한 흔적을 깔끔히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덕분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에반을 등에 업고 강행돌파해야 하나?
킨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내일 중으로 레어까지 안내해줄 자를 보내주신다고 했다. 천천히 안으로 움직이든지, 아니면 한자리에서 안내인이 올 때까지 기다리든지, 그건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다.』
‘안내인이 있으면 레어까지 걸리적거리는 것 없이 바로 갈 수 있는 거야? 시간은?’
『……인간의 발걸음보다는 빠를 거다.』
세이레이아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결국 사타나르가 보낸 안내인을 만나야지 알 수 있다는 소리다.
세이레이아는 킨이 전해준 이야기를 숨기지 않고 카타하르에게 전부 말했다.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던 카타하르가 그녀에게 다가섰다.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세이레이아의 귓불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아!”
약간 따끔했다.
짜증스런 손길로 귀걸이를 빼내다 귓불이 살짝 찢어졌다. 작게 맺혀 있던 핏방울이 손수건을 적셨다.
앞으로 흘러내리는 세이레이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카타하르가 한숨 어린 목소리를 흘려냈다.
“여전히 자신의 몸을 아끼시지 않는군요. 지난번에 말씀드렸을 텐데요, 시아 님. 자신의 몸을 함부로 하지 마시라고 말입니다.”
카타하르가 책망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봤다. 가슴이 뜨끔한 세이레이아는 눈만 굴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이 정도야 다쳤다고 할 것도 아닌걸요. 상처가 난 줄도 몰랐어요.”
“그게 더 나쁩니다. 어느 정도 통증이 있기 전까지 자각하지 못한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경계해야 하는 일입니다.”
“고작 이 정도 가지고 호들갑 떠는 것도 우스워요. 흉도 남지 않을걸요.”
“……흉터가 남더라도 시아 님은 개의치 않으시겠지요?”
세이레이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렸을 때 공방에서 날이 붙은 도구로 연습할 시기에는 손에 상처가 가실 날이 없었다. 그러니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카타하르는 속으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외부의 공격으로 인한 것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겠지만, 세이레이아 본인이 자신을 상처 내는 것은 어떻게 막아야 할지 막막했다.
본인이 제 몸 중한 줄 모르고 있으니.
난감했다. 봐라, 지금처럼 그녀 옆에 붙어 있어도 막지 못하고 결국 피를 보지 않았는가.
벌써 그녀의 피를 본 것이 횟수로 세 번이 넘었다. 어떤 이유로든 그녀의 피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손수건에 감싸인 말랑한 귓불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강한 압박에 세이레이아가 의아한 눈으로 카타하르를 봤다. 그는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는 듯했다.
“……카타하르 님?”
“제가 다시 얘기해도 시아 님은 잊어버리실 겁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자신의 몸을 함부로 대하시겠지요.”
세이레이아가 미간을 슬쩍 구겼다. 그의 말만 들으면 그녀가 허구한 날 몸에 상처를 달고 사는 사람만 같다.
“저도 자신을 아낄 줄 알아요. 카타하르 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마구잡이로 행동하지는 않아요.”
카타하르가 가만히 세이레이아를 응시했다. 그녀의 말이 진심인지 확인하듯이.
“그럼, 제게 약속해주실 수 있겠군요.”
“네? 무슨 약속이요?”
“앞으로 시아 님의 몸에서 피를 보는 일은 없을 거라는 약속 말입니다. 그것이 작은 상처든, 내상으로 인한 토혈이든 시아 님의 귀한 피를 흘리지 않겠다, 약속해주십시오.”
세이레이아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미간의 주름이 점점 깊어졌다.
“카타하르 님, 방금 하신 말씀이 얼마나 불합리한지 알고 계시죠? 어떻게 살아가면서 작은 상처도 입지 않을 수가 있어요? 하다못해 수를 놓다가 아차 하는 순간 바늘에 찔리기도 한다구요.”
게다가 앞으로 일이 잘 풀려 자리를 잡으면, 공방을 차릴 것이다. 대장간의 뜨거운 화로와 섬세한 작업을 할 시 사용하는 날카로운 공구들을 만지다 보면 소소한 상처들은 당연했다.
물론 그녀의 회복력이면 금방 씻은 듯이 사라지겠지만, 지금 카타하르가 요구하는 것처럼 아예 처음부터 안 다칠 수는 없다.
“그거야 시아 님께서 조금만 주의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도 굳이 귀걸이를 낚아채지 않으셨어도 되는 일입니다.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카타하르는 담담한 어조로 그녀를 설득했다. 세이레이아는 집요하게 달라붙는 카타하르의 눈빛을 뿌리치며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무리예요. 무리! 절대로 무리!”
“그럼, 시아 님의 몸에 상처가 날 때마다 시아 님의 시중을 드는 자들을 벌해야겠습니다.”
장난처럼 가벼운 투로 난처한 상황을 넘기려 했던 세이레이아의 분위기가 확 돌변했다.
“카타하르 님!”
세이레이아는 성난 눈길로 카타하르를 쏘아봤다.
카타하르는 가까이 붙어 선 그녀의 은회색 눈동자가 분노로 달아오르는 것을 봤다. 은은한 달빛처럼 반짝이던 눈동자가 한겨울밤의 시린 눈발처럼 가라앉아 차가운 열기를 뿜어냈다.
카타하르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제 선 안의 사람을 끔찍하게 위하는 세이레이아였다. 갖가지 이유를 갖다 붙여도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릴 것을 알기에 다른 수가 없다.
“농담이 아닙니다, 시아 님. 주인을 제대로 모시지 못해 그 피를 보게 했으니, 당연히 그 시중인들이 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협박이에요! 지금 제 사람들을 두고 절 협박하시고 계시는 거라구요!”
“네, 협박입니다.”
카타하르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도 알고 있다. 그나마 차근차근 엮어져가던 그녀와의 관계가 틀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생각을 바꿔놓아야 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세이레이아 본인이라는 것을. 뛰어난 검술과 강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녀가 자신의 몸을 함부로 대하지 않도록.
“저는 시아 님의 수호기사입니다. 당신을 보호하고 지키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 상대에는 시아 님도 포함됩니다. 제가 시아 님과 싸우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그의 진심 가득한 청에 세이레이아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카타하르처럼 그녀의 안위를 챙기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어릴 적 부모님이 살아 계셨을 때는 보호받는 것이 당연했다.
가문의 식솔들에게서 온갖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가문이 무너진 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세상에 홀로 남았을 때부터 그녀를 챙겨준 이는 그녀 외에 아무도 없었다.
이곳으로 넘어온 후도 비슷했다. 에반과 오하라 등이 그녀를 염려하긴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들과 자신 사이에 보이지 않는 얄팍한 벽이 세워져 있는 것을. 그것은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그리고 아마도 얇아지면 얇아졌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으리라는 것도. 그것은 그녀가 세이레이아가 아니기에 생겨난 벽이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끈끈해지고 단단하게 결합되더라도 사라질 수 없는…….
그래서 생경했다.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 세이레이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바닥에 깔리는 무거운 한숨을 따라 시선을 내린 그녀의 눈가에 긴 속눈썹의 어두운 음영이 드리워졌다.
카타하르가 세이레이아의 귓불에서 손수건을 뗐다. 접혀 있는 손수건에 붉은 핏물이 묻어 있다.
그는 도집과 귀걸이를 각각 잡고 있는 세이레이아의 손을 잡아 앞으로 모았다. 슬쩍 몸을 낮춰 바닥만 바라보고 있는 세이레이아를 아래에서 올려다봤다. 화로 가득하던 눈망울이 당황과 경계심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카타하르가 말없이 채근하자, 세이레이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눈빛을 떨쳐내듯 어깨를 들썩이며 심호흡하고 눈을 떴다.
“알겠어요. 위험한 일에 함부로 뛰어드는 일이 없도록 주의할게요.”
카타하르의 짙푸른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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