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매력적인.
그래서 더 위험했다.
지킬 수 있는 힘을 갖기 전에는.

감당할 수 없는 색기를 가진 여자, 민혜린.
그녀의 파란만장한 사랑이야기.


[본문 중에서]

혜린은 얼굴을 목도리로 칭칭 동여맸다.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쓰고 화장은 하지 않은 채, 머리는 단정하게 뒤로 동여맸다. 티셔츠는 최대한 펑퍼짐한 것으로 입고, 힙합 바지로 라인을 감춘 후에 두터운 오리털 파카를 껴입었다. 자신의 사이즈보다 두 사이즈나 큰 어그부츠까지 챙겨 신은 후에야 겨우 집을 나섰다.
어릴 때부터 ‘색기가 있다’, ‘도화살이 꼈네’ 등으로 수없는 말과 소문에 시달린 혜린이였다. 학교 때도 이상한 소문과 괴롭힘에 힘든 날들을 보냈다. 그렇게 해서 겨우 터득한 방법이 자신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는 것이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죽어라 공부해서 국내 최고 대학의 법대에 합격할 수 있었다.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입학 전부터 수도 없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지만, 혜린은 즐거웠다. 이제, 졸업하게 되면 지긋지긋한 집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고, 자신의 뜻대로 돈을 벌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먼 외국으로 혼자서 여행을 가고 싶은 작은 바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무사히 대학을 졸업했을 때의 이야기다. 지금은 당장 다음 학기 등록금을 걱정할 처지였다.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비싼 등록금을 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행히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는 배경 덕분에 과외 자리를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그나마 유지하는 것이 문제였다. 처음에는 호의적이더라도 그녀의 얼굴을 보거나 몇 번의 과외 후에는 여지없이 모두 잘렸다. ‘얘가 더 집중을 못하네요.’, ‘선생님이 좀…….’, ‘죄송해요.’ 정확한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 이유를 혜린은 알 수 있었다. 바로 자신의 색기 때문이라는 것을……. 하지만 금액으로 보면 과외만 한 아르바이트를 찾기는 힘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혜린은 과외를 꼭 하고 싶었다. 이번 과외도 어렵게 연락이 온 것이고 금액이 고액인 터라 더욱 조심스러웠다. 고3이라는 학생을 가르치는 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다만 걱정인 것은 그 학생이 남자라는 것이다. 이번에는 제발 문제가 없기를…… 혜린은 다시 한 번 복장을 점검하고 과외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집과는 너무도 다른 으리으리한 아파트의 모습에 혜린은 살짝 긴장했다.

띵동.
“어머, 선생님 오셨어요?”
이제 대학교 2학년이 된 혜린에게 선생님이란 호칭은 적잖이 부담스러웠다. 혜린은 고개를 푹 수그리면서 인사하고 얼른 안으로 들어섰다.
“과외하기 싫다고 말했잖아!”
“조용히 못해! 너 맡겠다는 선생님 구하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아니?”
투닥투닥. 엄마와 학생의 말다툼 소리가 들렸다. 과외 한 번 해보지 못한 혜린에겐 그 아이의 투정이 부러웠다. 자신이라면 정말 고마워하면서 공부할 텐데……. 한바탕의 소란이 끝나고 어머니가 나오셔서 혜린에게 민망한 웃음을 보였다.
“아직 아이가 철이 없어서…….”
“네…….”
고작해야 몇 살 차이가 안 나겠지만, 대학에 합격한 혜린은 선생님이 되고, 고3인 남자아이는 학생이 되어 버렸다. 혜린은 어색하게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서자, 얼굴에 온통 불만이 가득한 학생이 혜린을 노려보고 있었다.
“안 더워? 목도리 칭칭 매고?”
그제야 혜린은 목도리를 풀었다. 혜린이 목도리를 풀자, 남자아이의 표정이 돌연 바뀌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목도리로 꽉 동여맸던 입술은 습기가 차서, 더욱 빨개 보였고 새하얀 볼은 차가운 홍조가 맴돌았다. 목도리 안의 그녀는 꽤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벗어.”
혜린은 남학생의 도발적인 말에 숨이 턱 막혔다. 지금 이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뭘 그렇게 놀래? 안경에 습기 찼으니까 안경 벗으라고.”
그제야 혜린은 시야가 뿌옇게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좀 있으면 괜찮아져.”
혜린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자리에 앉았다. 꽁꽁 싸맨 파카를 옆에 얌전히 놔두고 가지고 온 수학책을 펼쳤다. 그런데 앞의 남자아이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혜린을 빤하게 바라보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지독히도 싸맸군.”
“뭐? 뭐라고?”
“훗. 아니야.”
“수학책 가져와 봐. 시험지도.”
“차민혁이야. 내 이름. 그쪽은?”
“혜린이야. 민혜린.”
“혜린? 이름 예쁘네.”
“반말은 하지 말아 줄래? 난 이 자리에 선생으로 왔고, 나이도 너보다는 많잖아.”
“나 한 해 꿇었어. 그 얘긴 못 들었어?”
학교를 꿇었다고? 혜린은 갑자기 심장이 떨렸다. 한 눈에 봐도 건장해 보이는 남학생이 한 해 꿇었다는 것은 폭력사건 등 문제아일 경우가 많다. 어쩐지 자신에게 과외가 들어왔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앞으로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 혜린은 살짝 한숨이 나왔다.
“몇 살이야?”
혜린은 입술을 꼬옥 다물었다.
“재수했어?”
“아니.”
“그럼, 별로 나이 차이도 안 나는데 꼭 존댓말 써야 하나?”
“그걸 지금 자랑이라고 말하는 거야? 수학 시험지나 가져와 봐.”
시험지는 가져올 생각조차 안 하고 민혁이 갑자기 눈을 바짝 얼굴에 대는 통에 혜린은 펄쩍 놀랐다.
“눈 많이 나쁜가? 안경 벗으면 좋겠는데.”
“매우 많이 나빠. 빨리 시험지나 가져와.”
사실 혜린은 시력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 다시 말해 검은 뿔테 안경은 위장용이다. 그나마도 워낙 하얀 피부와 대조되어 시선을 끌 때가 있지만, 대부분은 위장술에 넘어가 주기도 했다. 하지만 눈앞의 이 남자는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민혁은 혜린의 눈에 걸린 검은색 뿔테 안경을 치워 버리고 싶었다. 처음 과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민혁은 늘 그랬듯이 별로 내키지 않았다. 공부에 흥미 따위는 없었을 뿐 아니라, 공부에만 목매다는 현실도 우스웠다. 그런데 눈앞의 과외 선생이 모든 것을 바꾸어 버렸다. 갑자기 지독하게 과외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시험지 가져오라니까.”
목소리도 매력적이었다. 울림이 가득한 목소리를 듣자, 민혁은 침대에서의 그녀가 문득 궁금해졌다. 평소 주먹 쓰고 놀러 다니는 데 앞장섰던 민혁은 여자들도 많이 만나 보았다. 돈 많은 집안에, 건장한 체격에 터프한 민혁에게 달라붙는 여자들도 많았다. 하지만 정작 민혁은 여자들에게 별 흥미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성적으로는 꽤 담백한 스타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달랐다. 처음 본 순간부터 지독하게 남성의 본능을 자극하는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