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아픔을 간직한 채 무작정 아프리카 행을 결심한 은진은 그곳에서 자신만을 바라봐주는 한국계 혼혈인 크리스의 구애에 또다시 사랑의 아픔을 겪기 싫어 말도 없이 귀국을 한다. 집에 온 첫날, 동네 백수티를 팍팍 내며 자신의 집 아래층에 세 들어 사는 태후와 마주치는데 그와 마주칠 때마다 티격태격하던 은진은 그와 실수로 하룻밤을 보내고…….
자신을 찾아 한국을 온 크리스와 태후 사이에서 갈등하던 은진은 어느새 자신이 태후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태후의 어머니로 인해 결국 그와 헤어지게 된다.

-본문 중에서-

은진은 1년여 만에 돌아오는 한국 땅에 발을 디디며, 깊은 심호흡을 한번 내쉬었다. 뭐니 뭐니 해도 내 나라 내 조국이 제일이었다. 누가 그랬던가? 외국에 나가면 다 애국자가 된다고. 지금의 한국 기후에 적응이 되지 않아서인지 은진은 사파리 재킷을 단단히 여미고 공항 로비를 가로질러 밖으로 나왔다. 그동안 아프리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고생을 한 탓에 다이어트가 필요 없을 만큼 살이 쪽 빠져 버린 은진을 아마 1년여 만에 만나는 사람들은 아마도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여자치곤 큰 키라 조금만 살이 올라도 둔해보였던 1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은 정말 안쓰러울 정도로 마른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무작정 아무런 대책도 없이 자원해 버린 해외봉사였다. 처음엔 첫사랑에 대한 실패 때문에 그냥 한국을 떠나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봉사 활동이었지만, 아프리카의 오지들을 다니며 1년간 은진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것들을 배웠다. 기아와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은진은 자신이 얼마나 그들에게 미안한 고민을 하며 이곳에 왔는지를 떠올렸다. 당장 먹고 사는 것, 입고 자는 것이 걱정인 그들 앞에 은진의 고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몸은 늘 고단했으나 은진은 이곳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몇 달만 계획한 것이 길어져 1년의 시간이 지난 것만 빼면.
아프리카에 간다고 했을 때 처음에 그렇게 반대하던 엄마 역시 가끔 전화를 할 때면, 늘 자신의 안부를 물으며 건강을 걱정해 주었다. 늘 어머니 걱정만 시켜 드리는 못난 자식이었지만 그래도 엄마는 늘 은진의 편이었다. 비행기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겨우 한국에 도착하자, 은진은 갑자기 울컥하며 엄마가 보고 싶었다. 공항 앞에 대기 중인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하는 동안 은진은 자신이 떠날 때와 달라진 것 하나 없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그랬다. 자신이 없다고 해서 이 세상은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사랑에 한번 실패했다고 죽을 결심까지 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은진은 피식하고 웃음이 났다. 이렇게 지나고 보니 그 자식이랑 깨진 건 너무도 잘된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 너 없이도 난 잘 살아간다고…….

* * *

집에 돌아와 대문을 밀자, 둔탁한 굉음을 내며 문이 열렸고 은진은 얼른 2층으로 올라갔다. 문이 잠겨 있는 걸 보니 엄마가 어딜 가신 모양인데, 은진은 현관 문 앞에 있는 화분 밑에서 열쇠를 꺼내어 문을 열었다. 제가 오는 것도 모르실 텐데 이런 데다 열쇠를 떡하니 놓아두고 다니시다니. 몇 번이나 번호로 된 전자 잠금장치로 바꾸자 해도 엄마는 오히려 그게 고장이 더 잘 난다며 극구 사양했었다.
은진은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1층과 2층이 완전히 분리된 주택인 집에서 은진은 1층에서 지냈었다. 사진학과를 다닌 은진 때문에 1층에 암실을 만들면서 은진의 모든 짐은 1층으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었다. 어려운 살림에 자신이 사진을 배운다고 했을 때도 흔쾌히 1층의 세를 빼고 암실까지 만들어 주었던 어머니 때문에 은진은 제법 전도유망한 사진작가가 되었다. 이번 아프리카 봉사 중에도 현지인들의 애환이 닮긴 많은 사진을 촬영했고, 아는 선배를 통해 몇 달 뒤 사진전도 할 계획이었다. 사실 그곳에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사진전 때문에 서둘러 귀국을 한 탓도 컸다. 게다가 동생이 작년 중반쯤 군대 입대를 하고나서는 엄마 혼자 집에 계시는 것도 맘에 걸리고 여차저차 아프리카 생활을 접었다.
은진이 계단에 캐리어를 통통 튕기며 1층으로 내려와 문을 열었다.
어라? 이상하다!
문이 잠겨 있지 않아서 슬쩍 밀어보았더니 자신이 떠날 때는 거의 창고 분위기였던 곳이 어째서 살림을 하는 집처럼 꾸며진 것인지 은진은 안으로 들어가 집 안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머리를 갸웃거리며 있는데 뒤에서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남의 집에서 뭐하는 거야?”
은진이 재빨리 뒤돌아보자, 지저분한 긴 머리를 질끈 동여매듯 뒤로 묶고 꼬질꼬질한 트레이닝 복 차림의 남자가 은진을 쏘아보며 서 있었다.
“남의 집이라고?”
“그래. 여긴 내 집이라고! 너 뭐야!”
“허! 이 봐! 여긴 내 암실이 있던 내 방이나 다름없던 곳이라고. 너야말로 뭐하는 건데?”
“아! 네가 아주머니가 말한 그 딸이구나.”
그는 은진을 위아래로 한번 쭉 훑어보더니 피식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살다 살다 저렇게 매력 없는 여자는 처음 보겠다. 못생긴 건 아니지만 시커멓게 그을린 피부에, 깡마른 몸에 헐렁한 사파리를 입고 얼굴은 얼마나 말랐는지 광대가 도드라져 차마 눈뜨고 봐 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주머니말로는 꽤 예쁘다고 했는데, 역시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는 진리를 태후는 깨닫고 있었다.
그런 제 모습이 은진의 눈에 어떻게 비춰질지는 까맣게 모른 채.
은진은 동네백수티를 팍팍 내며 서 있는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세상에 살다 살다 저렇게 꾀죄죄한 남자는 처음일세! 머리 좀 단정히 하면 그런대로 봐 줄 만하겠는데.
그때, 초록색의 대문이 끼리리릭 소리를 내며 열렸고, 은진의 엄마인 영희가 1층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지나치다가 그 안에 은진과 아래층 총각이 서로 노려보고 서 있는 걸 보고는 반갑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은진아, 너 정말 내 딸 맞는 거냐? 어째 온다는 연락도 없이 온 거야?”
영희는 1년 새 몰라보게 달라진 딸을 끌어안았다.
“이놈의 지지배! 온다고 말이라도 하고 오지. 온다고 했으면 너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해 놨을 거 아니야?”
영희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자, 은진이 손을 들어 영희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어디 얼굴 좀 보자. 에구머니! 얼굴이 이게 뭐야? 그 봉사인가 뭔가 두 번만 갔다간 얼굴이 안 남아나겠다!”
영희는 그렇지 않아도 마르고 작은 얼굴의 은진이 더 마르고 얼굴이 반쪽이 된 것에 속이 상했다. 1년 전 실연을 했는지 한동안 먹는 걸로 스트레스를 풀어내다가 살이 오동통하게 오르더니, 갑자기 해외봉사를 간다며 떡하니 통보를 하고 아프리카고 떠난 은진이 1년여 만에 돌아왔는데, 이건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머릿결은 푸석푸석해 잡으면 끊어질 것처럼 윤기 하나 없었고, 얼굴의 살이 쏙 빠져 눈 밑이 퀭해진 것이 아무리 봐도 자신의 예뻤던 딸아이의 모습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구! 속상해. 그 나라는 봉사하러 온 사람에게 밥도 안 주디? 어째 이렇게 말랐어? 응? 안 되겠다, 너 다시 사람 꼴 만들라면 내가 당장 장이라도 봐와야지.”
영희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꿔다 놓은 빗자루처럼 서 있던 태후에게 은진을 소개시켰다.
“태후 총각! 인사해. 얘가 내 딸이야. 은진아, 인사해라. 우리 집에 세 들어 사는 총각이다. 앞으로 한집에 살게 되었으니 사이좋게 지내면 좋지. 은호 군대 가고 나 혼자 얼마나 무섭고 적적했는지 아니? 그래도 태후총각이 가끔 이 엄마랑 맞고도 쳐주고 얼마나 살갑게 대해 줬는지. 호호호……. 내 정신 좀 봐. 우리 딸 1년 만에 집에 왔는데 파티는 몰라도 저녁에 삼겹살이라도 구워 먹어야 하지 않겠니? 태후 총각도 오늘 우리 집에서 같이 저녁 먹자고. 알았지?”
“흐흐흐. 그럼 저야 좋지요,”
영희는 다시 초록색 대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영희가 그렇게 가고나자 더 뻘쭘해진 은진은 캐리어를 들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상황을 보아하니 자신이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어이! 아주머니 말처럼 한집에 살게 되었는데, 잘 지내보자.”
은진의 등 뒤에다 대고 태후가 소리쳤다.
“관심 없거든?”
은진은 태후의 말에 대꾸도 않은 채 그저 자신의 작업실이자 자신의 방이 없어진 것에 실망을 하며 다시 2층으로 무거운 캐리어를 질질 끌고 올라갔다.
자신의 말에 대꾸도 없이 ‘쌩’ 하고 돌아서서 2층으로 올라가는 은진을 보며 태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생긴 것처럼 성격도 이상했다. 2층 아주머니에게 듣기로는 아프리카에 갔다고 했는데 그곳은 사람 갈 곳이 못되는 모양이다. 아주머니 말로는 세상에 자기 딸만큼 예쁜 아가씨를 못 봤다고 했는데, 아주머니의 눈이 심하게 나쁘시거나 아님 정말로 고슴도치 같은 모정일 것이다. 아무리 봐도 예쁜 구석이라곤 찾아 볼 수가 없었는데 말이다.

* * *

거실의 소파까지 치우고 가끔 집에 손님이 찾아올 때만 엄마가 꺼내는 커다란 교자상을 꺼내었다. 은진은 그저 말없이 엄마를 도와주고 있었다. 금세 뚝딱 맛있는 겉절이와 야채를 씻어 내오고 냉장고 여기저기에서 손도 대지 않은 새 반찬들을 꺼내어 놓는 영희의 손이 분주했다.
“엄마! 됐어. 우리 둘이 먹을 건데 뭘 이렇게나…….”
상위에 수저를 두벌 올리며 은진이 말하자, 영희가 정색을 하며 은진에게 말했다.
“어엉? 우리 둘이라니? 아래층 총각도 불렀잖아.”
“언제?”
“아까.”
“참, 그보다 어떻게 된 거야? 왜 내 작업실에 그 남자가 살고 있어?”
“그럼 이 엄마는 굶어 죽고 있을까? 너 그렇게 떠났지, 은호도 군대 갔지. 아빠 돌아가실 때 나온 보험금도 이래저래 니들 학비로 야금야금 다 나가고 이제 남은 거라곤 이 집 한 채 뿐인데. 이거라도 팔았어야 했니? 그래도 태후 군이 다달이 세를 내주니까, 이 엄마 입에 풀칠이라도 하는 거라고.”
엄마의 말에 은진은 뜨끔했다. 사실 나이 서른이 되도록 직장엘 다닌 적도 없었고, 그저 엄마에게 용돈이나 타 썼으니.
“아! 미안, 엄마. 미처 그 생각은 못했네. 아빠 보험금, 다 썼어?”
“그럼. 몇 년 동안 너 대학 다니고 이래저래 쓴 돈은 다 어디서 난 줄 알아? 너도 이젠 변변한 직장을 구하던가, 아님 이도저도 아니면 이제 시집이라도 가던가.”
“또 얘기가 왜 그리로 튀어?”
자신도 막 직장이라도 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엄마의 잔소리가 시작되자 은진은 버럭 하며 엄마에게 대들고 말았다. 왜 하필 또 시집가란 말로 은진을 자극하는 것인지. 은진은 결혼 따윈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철저한 독신주의였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첫사랑에 실패하고 난 후, 남자에 대한 믿음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자신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엄마가 건드리자 은진은 저도 모르게 버럭 하고 소리를 지르고 만 것이었다. 그 바람에 시작되었다. 이른 바 모녀간의 전쟁! 만난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건만, 영희와 은진은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어쩔 땐 친구 같기도 하고 참 편한 엄마이긴 했지만 은진과 영희의 이런 소소한 말싸움은 절대 누구도 양보가 없었다.
“이놈의 기지배야! 네 나이가 몇인데? 어? 시집도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가야 좋은데 가는 거라고. 다 늙어빠지면 누가 데려가기나 한다니?”
“나, 아직 그 정돈 아니야!”
“여자 나이 서른이면 예전 같으면 할머니 됐다!”
“엄마!”
태후는 영희가 장을 봐오며 저녁을 먹으러 오라고 해서 막 2층 현관 앞에 섰는데, 닫힌 문 사이로 모녀간의 신랄한 대화가 오가는 통에 문도 두드리지 못한 채 서 있기만 했다. 계속 듣고 있자니 재미있기도 하고 정말 정이 넘치는 모녀지간 같았다. 태후는 이런 것이야말로 사람 사는 것이란 생각에 조용히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상을 다 차려 놨는데도 태후가 올라오지 않자, 영희가 은진에게 아래층에 내려가서 태후를 불러 오라고 했다.
“내가 왜? 처음 보는 남자한테 우리 집에 오라고 해?”
“난 바쁘잖니? 그리고 앞으로 잘 지내보라니까 얼마나 성격이 좋은지…….”
“성격만 좋으면 뭘 해? 완전 동네 백수 같던데. 저런 타입 딱! 싫어.”
“어머 얘는? 태후 군이 어디가 어때서? 저렇게 추리하게 있어서 그러지. 한 번씩 쫙 빼입고 나갈 때면 얼마나 근사한데? 동네 아주머니들한테 인기 짱이라고. 후후후…….”
“엄마, 혹시, 그 남자 좋아해?”
“그럼 좋지. 얼마나 살갑고 자상한지…….”
“엄마!”
은진은 엄마의 흐뭇한 표정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얘는! 귀청 떨어지겠다. 나도 분별력은 있다. 설마 내 나이에 자식 같은 태후 군을? 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어? 잔말 말고 어서 빨리 가서 데려와. 고기 다 타잖니?”
은진은 하는 수 없이 영희에게 등 떠밀리다 시피해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안에서 중저음의 매력적인 음색이 흘러나오고 그 목소리에 정신이 나간 것도 잠시. 그러고 보니 처음 볼 때부터 반말이네? 기분 나빠!
“울 엄마가 오란다. 그리고 왜 첨 보자마자 반말인데?”
“알거든, 네 나이. 아주머니가 하도 입에 침이 마르게 네 얘길 하셔서 말이야. 대체 얼마나 예쁜 아가씨일까 기대했더니. 이건 뭐, 아프리카에 있다 왔다더니 완전 난민도 아니고. 쯧쯧쯧.”
“그러는 너, 넌! 뭐 얼마나 대단한 외모인 줄 알아?”

현대물 상처남 소유욕 능력남 상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