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영: 무현, 나를 저주하세요. 나는 태양 같은 당신을 가리는 구름입니다. 당신을 어둠으로 물들이는 검은 먹구름입니다. 독버섯처럼 들어앉아 당신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는 나를 당신 안에서 몰아내 주세요. 뽑아내 주세요. 무현, 나의 님, 이것이 당신을 위한 제 사랑입니다.
가슴속에 눈물비가 장대비보다 더 쏟아져 내려도 운영은 미소 지었다.
제게 품은 그의 마음이 한 톨의 이삭도 남김없이 거둬질 수 있기를 바라며…….


서무현: 내 인생의 그늘이 짙어서 그대를 어둡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영! 그대는 내 전부다. 모든 것이다. 나의 빛이다!”
운영, 그대를 내 목숨보다 귀히 여길 것이다. 평생 그대만을 가슴에 담을 것이다. 앞으로 남은 내 삶은 오롯이 그대의 것이다.


주기현: 운영, 열 살 때, 처음 그대를 보았지……. 아버님을 따라 해운궁에 왔을 때 한 고운 여자아이가 꽃밭에서 뛰어노는 걸 봤소. 어쩌면 저리 고운 아이가 과연 사람일까? 싶어 다가가서 가만히 뺨을 만져보니, 그 아이가 방긋 웃으며 다짜고짜 오라버니, 저 꽃 꺾어 줘. 하더군. 사람이 꽃보다 더 예쁘다는 것을 난 그때 처음으로 알았지. 이 장미꽃보다 더 화사하고 예쁘게 웃음 짓던 그대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오……. 운영, 그대는 내 영원한 꽃이오. 시들지 않고 내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피어있는 단 하나의 꽃!”


(본문중에서)



윤이 자르르 흐르는 긴 머리를 한데 묶어 땋은 운영의 머리카락에서 이따금씩 바람이 스칠 때마다 알싸한 들장미 냄새가 났다.
그렇게 운영을 가슴으로 끌어안은 채 무현이 조용히 읊조렸다.
“이 심장소리 들리느냐?”
“……!”
“너를 보고 처음으로 뛰기 시작했다…….”
“나도……. 무현과 함께 있으면 막 심장이 뛰어요.”
무현과 눈을 마주하며 운영은 제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 없이 여전히 안타까운 얼굴로 무현이 자신을 보자 멋쩍어진 운영은 조금 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나도 무현 땜에 병이 날 것 같단 말이에요. 자꾸만 가슴이 할딱거리는 병…….”
“운영! 기억해라! 내 이름을. 이제부터 난 너의 사내다. 너 또한 앞으로 내 반려가 될 것이다!”
“…… 무현!”
무현의 느닷없는 말에 운영이 어리둥절해진 얼굴로 보았다.
그러나 무현의 동공 가득 번져 오른 불꽃을 보곤 저도 모르게 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맑고 차가운 겨울 하늘에 걸린 초승달처럼 서늘한 그의 두 눈이 잘 벼려진 칼날 같아 심장 깊숙한 곳에 와 박혔다.
“…… 지금은 비록 이렇게 헤어질 수밖에 없지만……, 너 때문이라도 난 반드시 가림국에 다시 돌아올 것이다!”
“무…… 무현,”
무현은 운영의 두 눈을 삼켜 버릴 듯이 응시하며 그녀의 두 어깨를 부여잡고 단단히 각인시키듯 읊조렸다.
무현은 꼭 돌아와야겠다는 당위성을 그런 식으로 해서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싶었다.
자신의 가슴에 의미가 되어주는 것, 눈앞에 있는 이 운영이라는 아이는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조금쯤 덜 허전한 마음으로 가림국을 떠날 수 있으리라.
“무현, 그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디 가는 거야?”
운영이 비명을 지르듯 다그쳐 물었다.
“잠깐, 헤어지는 거다. 이다음 운영이 조금 더 자란 아가씨가 되면 꼭 돌아 올 것이야.”
무현의 그 말이 운영의 가슴에 철렁하고 물소리를 내었다.
‘헤어지다니?’
무현의 저 어두운 표정을 보니 절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가슴속에서 삭풍이 휘몰아쳐오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