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여자라곤 나밖에 모르면서 어디서 여자를 잘 아는 척이야.”

“너도 나밖에 모르잖아. 나는 너만 알고 있어도 돼. 그러니까 너도 앞으로 계속, 나만 알고 있어.”

우리가 사랑에 빠진 순간은 언제였을까? 너무 오래되어서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런 ‘순간’은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늘 우린 함께였고, 모든 일을 함께 겪었다. 그래서 의문이 든다.

우리의 사랑은 진짜 사랑일까? 연민이나 동정은 아닐까?

“너한테 여자친구가 생기면 두 번째 자리는 나. 네가 결혼해서 아기를 둘 낳으면 다음 네 번째 자리는 나한테 줘야 한다고.”

“굳이 그렇게 순서를 정해야 해? 왜? 앨리, 소중한 건 그냥 다 소중한 거야.”

“아니야. 소중한 것에도 순서가 있어. 나는 이제 밀리는 건 싫다고. 그러니까 약속해.”

“앨리, 넌 언제나 내게 있어 첫 번째야. 내 안에서 네가 밀려날 일은 절대 없어.”

2. 작가 소개

정혜

착실한 청개구리

▣ 출간작

야차

달콤한 인생(eBook)

몸(eBook)

러브 크라임(eBook)

연담(eBook)

거절할 수 없는 제안(eBook)

3. 차례

Part 2

#4

#5

#6

Part 3

#1

4. 미리 보기

알렉스의 방 가까이에 섰을 때, 신음과 같은 짧은 소리가 정확하게 들렸다. 문을 밀었다. 침대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알렉스가 끙끙 앓고 있었다. 나는 빠르게 알렉스에게 다가갔다. 침대에 앉으려다가 젖은 몸을 깨닫고 엉거주춤하게 서서 알렉스의 어깨를 잡았다.

“알렉스.”

알렉스가 어렴풋이 눈을 떴다.

“흐읏…….”

앓는 소리가 가늘게 이어진다.

“알렉스, 일어나.”

나는 악몽을 꾸는 줄 알고 알렉스를 깨웠다. 알렉스가 가물가물 눈을 떠서 나를 확인했다.

“……앨리. ……윽!”

갈라진 목소리가 내 이름을 내뱉자마자 고통 어린 신음으로 단말마를 내뱉었다. 깜짝 놀란 나는 알렉스를 위아래로 살폈다. 이불도 걷어차고 있는 알렉스는 헐렁한 티셔츠와 얇은 바지라 몸의 선이 다 드러났다. 보기엔 아무 상처도 없다.

“알렉스, 왜 그래? 배가 아파?”

웅크린 모습을 보며 물었더니 알렉스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알렉스의 얼굴에 땀이 흥건했다. 목덜미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대체 어디가 아파서 그래? 일단, 일어나봐. 아니, 구급차…….”

아니, 땀부터 일단. 나는 허둥지둥 허리를 펴고 휴지를 찾아 사방을 둘러봤다. 아무것도 안 보였다. 몸을 돌렸을 때였다. 알렉스가 갈퀴 같은 손으로 내 팔을 붙들었다. 반동에 몸이 뒤로 넘어갔다. 자유로운 다른 손으로 침대를 짚어 넘어지는 것을 면했다.

“……앨리, 네가 먼저, 흐…… 먼저, 오라고, 했잖아…….”

알렉스가 헐떡이며 말했다. 들어도 뭔 말인지 모를 말이었다. 나는 그보다도 침대에 내 몸이 닿아 있는 게 신경 쓰였다. 나는 홀딱 젖은 상태였다. 거기다 휴지든, 수건이든 가지고 와서 알렉스를 좀 닦아주고 구급차를 불러야 했다.

“알렉스, 이거 놔봐. 나 1층에…….”

“으…… 난, 상관, 없었다고…… 누나가…… 흐읏…… 날, 돌보든, 말든…….”

그제야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에바 언니의 이야기다. 의문이 풀림과 동시에 나의 걱정은 한층 더 치솟았다. 갑자기 웬 옛날 일을? ……열이 있는 거였나? 이마 좀 확인하려 잡힌 손을 떼려는데 강한 힘이 나를 콱, 붙들어 통증마저 느껴졌다.

“알렉스, 이거 놓으라니까. 너, 열 있어? 감기에 걸린 거냐고.”

몸살감기인가. 그렇다면 이렇게 끙끙 앓는 것도 말이 됐다.

“……내가, 공동, 1위라면서…… 윽…… 그랬으면서, 이제, 아니라서…… 아읏!”

알렉스가 경련하며 고개를 웅크렸다. 잡힌 내 팔목에도 그만큼 힘을 줘 나 역시 “악!” 하고 비명을 질러야 했다.

“알렉스!”

걱정과 동시에 너무 아파 소리쳤다. 그래도 알렉스의 힘은 풀어지지 않았다. 헐떡이던 알렉스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어둠 속에서 핏발 선 눈이 나를 노려보았다.

“이제 내가, 1등이 아니라서, 나를 보내는 거지? 그래서 자꾸, 가라고, 하는 거지?”

알렉스가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그게 무슨…….”

“나, 다 봤어, 읏……. 그날, 도서실에서, 선배랑 껴안고 있었잖아!”

너무 황당해서 순간, 팔에서 느껴지는 아픔도 잊었다. 알렉스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깜박이는 눈 아래로 땀이 후드득 떨어진다.

“흑…… 앨리, 넌, 배신, 배신자야. 같이, 같이 있자고, 해놓고선…… 윽…….”

고통 때문인지 눈물 때문인지 모를 신음을 흘리면서 알렉스가 나를 원망했다. “으윽!” 하며 알렉스가 엎드리듯 몸을 웅크렸다.

“흐윽…….”

고통 섞인 울음이 새어나온다. 어깨가 경련하듯 들썩였다. 나는 아팠다, 아프지 않았다, 다시 아파지는 팔목을 잡인 채로 알렉스의 둥근 머리통을 내려다봤다.

“……알렉스. 일단 이거 놔봐. 나 비 때문에 젖어서 이렇게 침대에 있으면 안 돼.”

침착하게 말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구급약 통 갖고 올게.”

“……가지 마.”

알렉스가 흐느끼며 말했다.

“앨리, 나한테 가라고, 하지 마…… 흐윽…….”

“내가 언제 너한테 가라고 했어…….”

그런 뜻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알렉스에게 ‘엄마’를 찾을 기회를 주고 싶은 거였다. 마침 알렉스의 엄마도 알렉스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하니까……. 알렉스가 젖은 얼굴을 들었다.

“……가라고, 했잖아, 엄마, 엄마 만나라고…… 그러면, 난 떠나야 한다니까……!”

울음 사이, 사이 호흡이 거칠어지며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선배, 선배 때문에, 그러는 거지?”

“걔는 아무 상관 없어.”

“거짓말!”

잡아 찢을 듯이 외치고 알렉스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불시에 쏟아진 힘에 몸이 앞으로 엎어졌다.

“알렉스!”

“선배가, 너, 너한테 고백, 하는 것도, 나, 다 들었어.”

알렉스가 얼굴을 수그리고 내 귓가 근처에서 헐떡였다.

“……걔가 고백한 건 내가 아니라, 우리 고문 선생님이야!”

고개를 들자, 알렉스의 얼굴이 코앞에서 보였다. 눈은 잔뜩 충혈되어 있고 눈물도 계속해서 흐른다.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이마에 지저분하게 달라붙어 있었고, 목덜미도 흐르는 땀에 번들거렸다.

“알렉스…….”

이름을 부르자, 알렉스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쿵, 하고 알렉스가 수그린 이마와 내 광대가 맞부딪혀 “윽!” 하고 내게도 신음이 터져 나왔다.

“바꿔…… 바꿔…….”

알렉스가 울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얼얼함과 어리둥절함에 휩싸여 눈썹을 찡그렸다.

“뭐, 뭘 바꿔.”

“다시, 다시, 내가 1등 해……. 흑…… 세라, 세라 이제, 안 좋아해.”

알렉스가 고개를 들고 다급하게 말했다.

“세라, 이제, 난 세라, 싫어, 그러니까, 앨리 너도, 선배, 보내, 선배 버려……!”

내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알렉스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고개가 떨어졌다. 얼굴이 다시 부딪치고 나는 신음을 입안으로 삼켰다. 알렉스가 내게 매달렸다.

“버려…… 바꿔, 다시……!”

“알렉스, 좀……!”

허리가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서 아팠다. 밀치듯 알렉스 어깨를 잡자, 더 커진 울음소리와 함께 더욱 끌어 안겼다.

“난, 싫어…… 으윽…… 싫어, 두 번째는, 세 번째도, 네 번째도 싫어……! 가, 가라고 하지 마, 나는 여기, 여기에 있고 싶어, 아빠, 흑……, 아빠, 하고 있을 거야……. 애, 앨리, 너랑 있을 거야……!”

뜨거움이 내 얼굴을 적시고 목덜미를 적셨다. 나는 상체와 하체가 분리될 것 같은 아픔을 참으며 발을 움직여 침대로 겨우겨우 올라왔다. 통증이 사라지면서 안도의 깊은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한동안 숨만 내쉬다가, 울음과 신음을 토해내는 몸을 끌어안았다.

엉망진창……. 비에 젖은 몸은 눅눅해서 찝찝하고, 아픈 데가 어디인지 확인도 안 하고 이러고만 있어도 되나 싶었지만 곁에 달라붙은 몸이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자꾸, 버리고, 가지 말라고만 한다. 나는 알렉스의 등을 쓸었다.

“알렉스, 알았으니까 그만 말해. 너 말할 때마다 쇄골이 아파.”

비틀려 닿아 있는 몸은 여기저기 아귀가 맞지 않아 서로에게 고통만 주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엮인 몸을 풀지 않고 그대로 누워 있었다.

알렉스는 때때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때마다 나는 등을 쓸어주는 것 외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억센 힘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르릉, 하늘이 운다. 번개도 지나갔다. 비는 여전히 세차게 내리고 있었고, 내 몸도 여전히 젖은 채였지만 나는 알렉스의 숨이 가라앉고, 편히 잠들어, 다시 깨어날 때까지 가만히 알렉스를 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