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전자책으로 출간되었던 남기(男妓)의 종이책 출간본입니다.



그 사람의 대금 소리가 너무도 슬펐다. 뼈마디가 척척 끊어지는 듯한 아픔이었다. 그 대금 연주를 듣는 순간 내 가슴은 온전히 그에게로 사로잡히고 말았다. -- 은평.

나는 그때 처음으로 사내가 되고 싶었다. -- 아령.

여인들을 상대하며 천한 남기로 살아가던 아령은 은평을 만나고 처음으로 한 여인의 사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은평은 영의정 댁의 금지옥엽이었고 그는 천한 남기였다.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넘어갈 수 없는 사랑. 은평과 아령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 노래, 단심가!


-본문 중에서-

교방 안쪽, 아주 은밀하고 은밀한 곳에서 아령이 남몰래 춤사위를 나풀거리고 있었다. 그의 어미는 그곳의 기녀였다. 그는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아비에 대해선 아는 것이 없었다.
그 어미는 사내에게 버려진 서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수년 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나이 여덟일 때부터 거문고를 타고 가야금을 뜯고 대금을 불었다. 그 나이 아홉일 때에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그 어렵다는 검무와 학무까지 척척 추었다. 그의 어미가 그랬다. 타고난 춤꾼이었고 악기 다루는 솜씨 또한 일품이었다. 특히 거문고에 능한 이였다. 그 피 징그럽다고 교방 행수 무아가 혀를 내둘렀을 정도니 아령의 솜씨는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재주는 하나도 뽐내지 못하고 그를 은밀히 찾는 여인들을 상대하며 그저 남기(男妓)로 살았다. 어미가 살아 있었다면 재주 많은 아이가 그리 되는 것을 두고 보지만은 않았을 것이나 사고무친(四顧無親)으로 교방에 버려진 아이를 내치지 않고 거두어 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일이었다.
아령은 어렸을 때부터 교방의 기녀들이 모두 한마디씩 보탤 정도로 용모가 수려하였다. 커 가며 그 빼어난 용모는 더욱 빛을 발하여 훤칠한 키에 다부진 골격, 태양을 품은 듯 눈부신 얼굴은 여인의 애간장을 절로 녹일 정도였다. 그리 잘생긴 그가 남기가 된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다.
훨훨. 펄럭이는 춤사위가 서러웠다. 그는 예인이 되고 싶었다. 어미처럼 음악과 춤으로 사람들의 혼을 사로잡는 예인이 되고 싶었다. 어릴 적엔 교방에 있으면 저절로 그리 되는 줄 알았다. 그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여인네들이 그의 몸을 더듬을 때면 그것이 무언인지도 모르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뼛속까지 차올랐다. 치욕감마저 몰려와 저도 모르게 눈물이 질금질금 나올 지경이었으나 입술을 깨물고 견딘 것은 그리하지 않으면 예인이 되지 못하리라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철이 들어 예인이 될 팔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후였다. 서러운 목숨 더는 살 의미가 없다 하여 손목을 긋고 목을 매고 독약을 삼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모진 삶은 끝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제 그의 나이 스물. 그는 주어진 운명을 넘어서지 못하고 여전히 남기로 살고 있었다. 하지만 매일매일 꿈꾸었다. 한순간만이라도 예인으로 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그 삶의 한과 바람을 고스란히 담은 그의 춤은 아름다우면서도 서러웠다.
“아령!”
교방 행수 무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뜰을 울렸다. 그가 춤을 추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었다. 그의 춤 솜씨가 뛰어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누구도 남기의 춤을 원하지는 않았다.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하는 예인들은 기녀들로 충분했다.
“아령! 어찌해 춤을 추는 것이냐? 그만 멈추어라. 그만 멈춰.”
그가 춤을 멈추지 않자 무아가 더욱 소리를 질렀다. 그는 짐짓 더 아름다운 춤사위를 뽐내며 춤을 추었다. 그의 춤은 교방의 어떤 기녀들보다 빼어났다. 하지만 무아는 그가 춤을 추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춤을 출 수 있게만 해 준다면 무아가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할 것이라 하였으나 그녀는 그의 간절한 청을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하였다.
-너는 남기다. 몸을 파는 천한 기생일 뿐이다. 너 따위 남기가 어찌 예악을 더럽힐 수 있단 말이냐?-
천한 기생. 남기. 그리 되고자 원한 적 없었다. 그를 그리 운명 지은 것은 무아, 그녀였다. 그녀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 가고도 일말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운명이라 타박하며 그가 춤추는 것조차 못마땅하게 여겼다. 무아가 싫어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더 춤에 매달렸다. 거문고와 가야금에 매진하고 대금을 불었다.
“그만! 그만하지 못할까!”
무아가 더욱 분을 토하며 소리를 지르자 그가 그제야 춤을 멈추고 예를 갖추었다.
“어머니, 나오셨습니까?”
깊고 그윽한 목소리. 여인의 가슴을 사정없이 뒤흔드는 미소. 그는 점점 더 사내가 되어 가고 있었다. 달리 무엇을 과장하지 않아도 온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강인한 수컷의 향기는 도성의 지체 높은 여인네들까지 절로 자지러지게 만들 정도였다.
그의 첫 여인은 대대로 열녀를 배출한 충민 정씨 가문의 맏며느리로 마 부인이라 불리는 이였다. 그녀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열녀비까지 세운 열녀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으니, 밤마다 아령을 찾은 지 이미 여러 해였다.
그녀는 그 가문의 위세만큼 아령에게 줄 수 있는 것도 많았다. 이제 그는 무아의 손에 애처로이 흔들리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지금 그의 위세라면 무아를 교방 행수 자리에서 쫓아내고도 남았다. 무아는 그것이 더 못마땅하여 그에게 더욱 날카롭게 날을 세우는 것이었다.
“춤을 추지 말라는 명을 어찌 또 어긴 것이냐?”
“이 은밀한 곳에서 소인이 춤을 춘다 한들 무슨 일이 있겠사옵니까? 소인, 예인이 되겠다는 소망은 버린 지 오래입니다. 사내가 그리운 여인네들에게 수컷의 향기나 풍기며 그저 남기로 살고자 결심한 것을 어머니께서도 모르지 않을 것이니 이제 그만 닦달하십시오.”
“저, 저…….”
아령이 예를 갖추고 물러나자 무아는 그의 무례함에 분기를 참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고 대감 댁 마나님들이 아끼는 최고의 남기를 함부로 다룰 수도 없었다. 그 방자함에 치가 떨려도 그저 참아야 하니 분기만 더욱 용솟음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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