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봄날의 바람처럼 아무 의미 없는 사람일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굳게 다물고 있던 한겨울 얼음들이 봄 햇살 아래 아무런 저항 못하고 사라지듯, 사랑 앞에 서투른 수민과 현우가 지난 아픔들을 보듬고 진정한 사랑을 꿈꾸려 한다.

-최수민(30세)-
단 한 번 사랑의 실패로 인해 사랑을 두려워하는 여자. 잘 다니던 종합병원을 때려치우고 백조생활을 근 1년째 유지 중 반갑지 않은 옛 남자와의 만남을 피하기 위해 외갓집인 강원도 산골짜기 북촌으로 들어간 그녀. 첫 만남부터 삐걱거리던 장현우를 도와 예기치 않게 진료소 봉사를 시작한다. 사랑 앞에서 한 없이 작아졌던 그녀가 그로 인해 다시 용기를 내어 사랑을 시작하려 한다.

-장현우(30세)-
과거의 아픔을 잊으려 북촌으로 들어와 공중 보건의사로 근무하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는 남자. 차갑고 날카로운 인상이지만 그의 미소는 모든 근심을 잊게 할 만큼 매력적이다. 천방지축 최수민이란 여자를 알게 되면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찾아 가게 된다.

-송민우(32세)-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망설임 없이 사랑하는 여자를 버릴 수 있는 남자. 8년이 지났지만 그녀를 향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깨닫고 다시 그녀를 찾으려 하지만 여전히 이기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사랑을 만들려 한다.



<본문 중에서>

“다른 사람 얼굴 보는 것이 취미요?”
적막을 깨우는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여전히 골대에 시선을 집중한 채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그녀를 향해 무심하게 날아들었다.
‘저 인간이 내 취미를 어떻게 알았지?’
수민은 속으로 생각을 하며 쭈뼛거렸다. 그리고 상채를 벗은 남자의 몸이 자신에게 가까워 지는 것을 보며 화들짝 놀라 붉어진 뺨을 돌려 뒷산 쪽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벗은 상체 때문인지 그녀의 볼이 붉게 물드는 모습이 재미있어 현우는 더욱 대담한 자세로 그녀 앞에 멈추어 섰다.
“이름도 모르는 남자 몰래 쳐다보는 것을 즐기는 사람인줄 몰랐소.”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일어서지도 가만히 앉아 있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또랑또랑한 두 눈에 힘을 주고 쏘아보며 말을 했다.
“누가 몰래 쳐다봤다고 그래요? 사색에 잠긴 사람 방해한 사람이 누군데?”
그는 땀에 젖은 단단한 상체 위로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니 그의 넓고 단단한 가슴은 마치 태백의 산처럼 웅장해 보였다. 옷을 다 입었는지 그는 수민 옆에 털썩 주저앉고서 한 손으로 땀방울이 맺힌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한 시간 남짓 농구 골대를 향해 뛰던 그의 거친 숨은 깊은 심호흡으로 조금씩 편안해 지고 있었다. 자신의 출연으로 여자는 제법 놀란 듯싶었다. 아직도 얼굴이 빨간 채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뒷산만 바라보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장현우라 합니다.”
“…….”
그는 옆에 앉아서 딴청을 하는 수민을 바라보며 자신의 이름을 건넸다.
“사람이 말을 하면 그에 대한 대답을 하는 것이 예의 아니오? 여전히 상대방의 배려를 눈곱만치도 찾아 볼 수 없는 사람인가보구만.”
가시 돋친 그의 말을 되받아치는 수민 역시 말이 곱지 않았다.
“뭐라고요? 제가 언제 당신 이름 알고 싶다 했나요? 당신 같은 사람하고 말도 섞고 싶지 않은 게 제 솔직한 마음이네요!”
조용한 시간을 방해받은 것이 사뭇 짜증나던 수민도 한껏 찡그리며 그와 마주했다. 솔직히 그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몇 분전만 해도 그녀의 마음속에서 움틀 거렸지만 그의 안하무인적인 태도를 보자 역시 자신이 생각을 잘못했음을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더 이상 그와 함께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벌떡 일어나 운동장 모래가 날릴 정도로 성난 발걸음을 옮기던 수민을 향해 그가 성큼 다가와 앞을 막았다.
“미안하오.”
“…….”
“화나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니요. 다만.”
현우는 운동장에 나타난 그녀를 보고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었다. 오랜 운동으로 단련된 자신의 농구실력을 뽐내고 싶은 유치한 마음이 들어 한 시간 동안 뛰었음에도 무리를 해서 공을 던졌다.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어 하는 자신의 마음을 굳이 막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꾸만 어긋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심한 생각까지 들었다. 너무 오랜 동안 여자와 대화를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여자에 대해 자신이 너무 무지해서 그런지 그도 영문을 몰라 당황스러웠다.
사실 예전 영서는 자신에게 뭐든지 잘 맞춰주었던 사람이었고 자신이 특별히 여자의 비위를 맞추려 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 그가 여자에 대하여 무지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해답을 모를 때는 솔직한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지론을 갖고 있던 현우였기에 자리를 박차고 가버리는 그녀의 이름이라도 알아내고 싶었다.
“당신의 이름이 궁금했소.”
현우의 진심어린 눈빛과 마주친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싱그러운 봄 바람결을 타고 색색의 꽃들의 향기가 그녀의 코끝을 간질이며 지나갔다. 따스한 햇살만큼이나 그의 선한 눈빛이 그녀의 가슴에 따스하게 들어와 빛을 비추이는 듯 했다.
아무 대답 없는 그녀를 보며 그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역시 잘 생긴 얼굴이란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 이름이 왜 궁금하죠?”
“나도 모르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요?”
현우는 도무지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슬슬 피곤해 지려했다. 어쩌면 저 여자에게 관심이 가는 것 자체가 피곤해 지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워낙에 피곤한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싫어하던 현우였기에 그만 이쯤에서 접는 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리라. 하지만 가슴 한쪽 구석에서 피어오르는 희미한 불빛처럼 다가오는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분명 아무에게나 느낄 수 있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그의 어두워지는 표정을 읽었을까. 수민은 어두워지는 그의 표정이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최수민이에요.”
그녀의 대답에 순간 그의 표정이 환한 보름달처럼 둥글게 떠올랐다. 날카롭게만 보이던 그에게 이런 귀여운 면이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순간 웃음을 참지 못했다.
“풋…….”
현우는 그녀가 갑자기 왜 웃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그러는 거요?”
“아니에요. 그냥 웃겨서요. 당신한테도 꽤 귀여운 표정이 있다는 게 신기해서.”
난생 처음 귀엽다는 말을 들은 현우의 표정이 어이없었다. 이렇게 덩치가 큰 남자에게 귀엽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역시 당신 시력은 확실한 검사를 해봐야할 필요성이 있겠어.”
“뭐라고요?”
“아……. 아니요.”
여전히 그 둘의 대화는 약간씩 어긋났지만 두꺼운 장벽과 같던 둘 사이의 벽은 점점 얇아지고 있었다.
“혹시 쥐약 있어요?”
“쥐약은 왜? 혹시…… 실연 당했소?”
그의 어이없는 질문에 그녀는 황당함으로 벌려진 입이 다물어 지지가 않았다.
“쥐약하고 실연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너무 드라마를 많이 보신 거 아닌가요?”
그녀의 새치름한 대답에 머쓱해진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쥐약은 없소.”
“없으면 할 수 없죠. 그럼 안녕히 가세요!”
“대신 쥐덫은 있는데. 필요하다면 가져가시오”
쥐덫이 있다는 말에 그녀의 얼굴이 순간 밝아졌다.
“정말요? 어디에 있어요? 빨리 줘 봐요.”
“지금 여기엔 없소. 당연히 진료소에 있지.”
“그럼 얼른 진료소로 가요. 빨리! 이야. 더 이상 쥐하고 같이 자지 않아도 되겠다. 야호!”

쥐 덫 하나에 저렇게도 좋아하는 여자는 난생 처음 보았다. 몸을 휙 돌려 자신보다 앞서 가버리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현우는 그녀가 꽤 사랑스러운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찰랑거리는 머릿결이 바람결에 흩어지는 벚꽃처럼 유난히 경쾌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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