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각인 - 로맨스 소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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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258-24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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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헤어지자.”

단 몇 자의 말로 끝났던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하지만 몇 년 후, 다시 만난 너에게 건넨 건 원망 담긴 날카로운 말이 아니라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인사였다.

이미 흔적조차 사라진 거라 생각했던 붉은 실.
정말 그 붉은 실은 사라져 버린 걸까?

다시 만난 이들의 답답미묘한 이야기.

<미리보기>

“너 누구냐?”
내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나에게 안긴 꼴이 된 하정이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후배가 보여주는 하극상에 순간 욱할 뻔도 하였지만 이 아이는 현재 술에 취한 상태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 나는 네 선배인데, 여효준이라고.”
내가 자리에 늦게 도착했으니 나를 몰라도 이상한 건 없었지만 나를 몰라보는 하정의 행동에 내심 서운한 생각도 들었다. 하정이 나의 질문을 무시했던 것과 달리 나는 친절히 나란 사람에 대해 설명하려 했지만, 하정이는 자신의 어깨 위에 있는 나의 손을 치우더니, 다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정아, 너 집에 안 가?”
“…….”
어쩌면 날이 셀 때까지, 혹은 술이 깰 때까지 이 공원을 돌아다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던 내가 끝내 하정이에게 묻고 말았다. 하지만 하정이는 나의 말은 귓등으로 듣고 흘려버리는 듯했다.
“아이고, 좋네.”
그러더니 가로등 밑에 있는 벤치에 털썩 앉아버렸다. 설마 여기가 집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벤치에 기대앉은 하정이는 편안해보였다. 그에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집에 가야지. 얼른 일어나.”
벤치에 앉아있는 하정이의 팔을 내가 끌었으나, 술에 취해 축 늘어진 하정이는 꼼짝도 않고 있었다.
“이거 놔.”
자신의 팔을 끌어당기는 내가 귀찮은지, 하정이가 또 한 번의 하극상을 선보였다. 이제야 슬슬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는지 점점 눈이 탁해지고, 행동 또한 느려지기 시작했다. 이 난관을 어찌 해결해야 하는가, 오늘 처음 면을 튼 거나 다름없는 하정이니, 내가 하정의 집을 알 리가 없었다.
“어! 달떴다.”
내가 곤란해 하든 말든 술에 온 정신을 의탁한 하정이는 현재 자신의 기분에 충실한 상태였다.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달이 떴다며, 박수까지 치며 좋아하기 시작했다. 저녁이니 분명 달은 덩그러니 떠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하정이가 가리키고 있는 달은…….
“가로등인데?”
나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채 하정이가 달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그 무언가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아무리 보아도 하정이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앉아있는 벤치를 밝혀주는 전구가 둥근 가로등이었다.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달~”
역시 이번에도 나의 말은 그대로 무시한 채 하늘의 달을 보며-가로등- 노래까지 불러대며 좋아하고 있었다.
“저거 달 아니라니까.”
하정이가 술에 취한 것은 알지만 연거푸 나의 말이 무시되자 기분이 나빠진 내가 하정이에게 볼멘소리를 뱉고야 말았다. 역시나 하정이는 그런 나의 말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되게 동그랗다.”
여전히 하정이는 주황빛을 내는 가로등을 달이라고 믿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런 하정이의 모습을 진짜 하늘에 떠있는 반달이 민망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의 의미 차이는 있겠지만 지금 하정이의 모습은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 라는 말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보름달 같은 내 얼굴~ 예쁘기도 하지요, 눈도 반짝, 코도 반짝 입도 반짝반짝~”
다른 동요를 개사하는 것은 물론 율동까지 섞어 나에게 학예회 무대를 보여주고 있었다. 반짝반짝이라는 가사에 맞춰 하정이가 팔을 들어 동그라미를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동작으로 양 손을 자신의 턱 밑으로 내려 자신의 얼굴 밑에 꽃받침을 만들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나의 웃음소리에 반응한 건지, 하정이가 여전히 턱 밑 꽃받침을 유지한 상태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는 하정이에게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엔 어떤 하극상을 보여줄 것인가 이제 점점 기대가 되고 있었다. 이 일을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내일 하정이를 만나면 꼭 놀려 주리라, 마음먹었다.
방긋.
어떤 무지막지한 말이 나올지 기대까지 하며 하정이의 행동을 살피고 있는데, 그런 나의 기대와 달리 하정이는 눈을 반달로 접으며 나를 향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저런 해맑은 웃음을 지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던 나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가로등 밑임에도 어두웠던 이곳의 밝기가 하정이가 웃음으로 해서 점점 밝아지고 있는 듯한 기묘한 장면을 목격했다. 꽃받침을 한 채로 꽃처럼, 아니 달처럼 밝게 웃어버리다니, 하정이의 노래처럼 하정이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하정이가 가로등이라는 새로운 달을 발견했듯, 나도 오하정이라는 새로운 달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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