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율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바위 위에 흩뿌려져 말라 있던 검은 핏자국들이 살아 요동을 쳤다. 온몸을 찔러오던 전장의 창칼들, 그 창칼을 타고 울컥울컥 쏟아져 나오던 핏덩이들, 그리고 그 순간에 느꼈던 죽음의 환희를 이 여자는 알까? 그 칼들보다 더 모진 아픔으로 가슴을 파헤치던 죽은 사비의 존재가 순식간에 분노가 되어 치받아 올라왔다. 분노와 원망 앞에 그리움은 숨어들었다.
“어딜 도망치려고……?”
두 해 반 만에 들어보는 해율의 음성이 분노와 원망으로 떨렸다. 턱뼈가 으스러지도록 움켜쥐고 있는 그의 손도 떨렸다. 붉은 눈자위 속에 분노와 원망이 눈앞의 단하를 삼켜 버릴 듯 이글거렸다.
무사히 도망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그저 꿈이려니 생각하며 살아가리라 생각했었는데……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그게 길일 터인데…….
자신은 사비가 아니라 단하라고, 그러니까 놓아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단하의 붉은 눈에서 의지를 외면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눈물이 턱을 움켜쥔 해율의 손가락에 닿았다. 뜨겁고 촉촉한, 살아 있는 눈물이다. 차가운 바닷속을 떠도는 죽은 영혼이 아니다. 이렇게, 멀쩡히, 사비는 살아 있다.
“어딜…… 도망치려고?”
그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분노와 원망의 음성도 흘러내리는 눈물만은 감추지 못했다. 해율은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지도 못한 채 단하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소연검이 앞을 막으려 했지만 군사들의 칼이 먼저 그를 막았다.
가리옹성의 갯나루에 차가운 바람이 일었다.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도 잊은 채 해율은 걸음을 옮겼다. 무너지듯 주저앉으려던 단하의 몸이 그의 손에 잡혀 울컥울컥 딸려갔다. 어디든 끌고 가 가두어 버릴 참이다. 다시는 도망 못 가도록, 혼자서는 죽지도 못하도록 꽁꽁 묶어 가두어 버릴 참이다.
사비를 끌어 말에 태우고 성으로 말을 달리고 다시 손목을 잡아끌어 관으로 들어설 때까지 해율의 가슴은 수없이 터지고 부서졌다. 자신의 손에 잡힌 이 자그마한 사내가 사비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다시 힘을 주고, 손바닥에 전해오는 살과 피의 뜨거움으로 그녀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터질 것 같은 이 가슴은 분노 같기도 하고 원망 같기도 하다. 절망 같기도 하고 희열 같기도 하다.
관을 지키던 병졸들과 노비들이 곱상한 사내의 손목을 움켜잡고 들어서는 성주를 의아한 눈으로 내다보았다. 해율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사내의 손목을 끌고 있고, 끌려가는 곱상한 사내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이다.

[미리보기]

“제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젠지 아세요? 바로 바다에 들어가 있는 순간입니다. 바다는 제게 자유를 줍니다. 그곳에는 천민도 귀족도 없습니다. 다만 누가 자맥질을 더 잘하느냐만 중요하죠.”

그곳으로 가면 나도 행복한 순간을 맞을 수 있을까?
쨍, 부딪히며 튀어 오르는 칼날의 불꽃이 눈앞에서 번쩍였다. 그것은 부서지던 햇살보다 더 반짝이며 빛을 내던 사비의 흔적처럼 눈부시다.
이 번쩍이는 빛이 나를 네게로 데려다 주겠지? 난 어디서든 널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넌 날 알아볼 수 있을까? 꿈도 희망도 잃어버린 나를, 더 이상 어떤 열망도 가지지 못한 나를 너는 알아볼 수 있을까?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칼을 피하며 빙글 돌아가던 해율의 몸이 나뭇등걸에 부딪혔다. 휘청 꺾이는 몸뚱이 위로 더운 바람이 스친다.

“세상을 다 가지신 연후에…… 소인도 가지십시오.”

가질 네가 없으니 내가 세상을 다 가질 이유도 없어졌다. 아느냐?
여강이 일으키는 칼바람이 귀를 스친다. 여강의 칼끝에는 왠지 독기가 서려 있는 듯하다. 허망만이 서려 있는 자신의 칼과는 대조적이다. 허망이 독을 이길 수는 절대 없는 법. 챙, 부딪는 칼의 힘이 손바닥을 거쳐 온몸으로 울려 들어왔다. 순간 해율의 몸이 휘청 흔들리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다시 무너지듯 하늘을 보며 쓰러졌다. 여강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몸을 날려 해율을 향해 칼을 내리꽂았다.
무언가 서늘한 기운이 복부를 파고든다. 온몸을 들끓고 있던 분노와 화들이 한순간에 뜨거운 열을 뿜으며 몸 밖으로 빠져나갔다. 금방이라도 푸른 물이 뚝뚝 흘러내릴 것 같은 짙푸른 하늘이 보였다. 그것이 한 겹, 두 겹 주름을 만들며 파도가 되었다. 햇살들도 자잘히 부서져 흩뿌려진다. 눈앞에 펼쳐진 그것은 걸로의 바다다.
“사비야…….”
이리가면 날 받아주겠느냐? 그곳으로 가면…… 자맥질을 못하니 너의 세상인 바다에서 나는 누구보다 못난 사내가 될 거야. 그래도…… 그래도 날 받아주겠느냐?
뜨거운 열기와 함께 역한 피비린내가 온몸을 뒤덮어 올라왔다. 놀란 여강의 눈동자가 맞닿을 듯 다가와 있다.
“왜……?”
왜 스스로 칼에 찔렸느냐고 그가 묻는다. 해율은 다시 빙긋 웃었다. 그토록 열망하던 사비의 곁으로 한순간에 보내주니 고마운 자다.
울컥, 핏덩이가 목구멍으로 넘어왔다. 멀리서 귀에 익은 북소리와 함성이 들려왔다. 드디어 무영 장군이 당도한 모양이다. 짙푸른 하늘이 노랗게, 그리고 점점 하얗게 변해갔다. 해율의 무거운 몸도 바닷속으로 침잠해 갔다. 차갑고 부드러운 물이 그의 몸을 감싸고 어딘가로 끝없이 유영해 들어간다. 그 깊은 바다, 심연의 끝에서 그리운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 눈은 이슬을 머금은 듯 반짝이며 환한 미소로 그를 맞아주는 여자…….
해율 님…….
사비야…….
이제 됐어. 이렇게 네 곁에 무사히 왔으니…… 됐어.
해율은 드디어 무거운 눈꺼풀을 고요히 감았다.

mbc베스트극장 <나비>
<소령아> <밤배> <내 숲에 찾아온 악동> <연> <은허당> <홍련> <여름을 달리다> <그래도 네가 좋아>

미디어 리뷰가 없습니다.

별점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