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어둠 속에서 너에게 다가올 것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건장한 남자를 보는 순간, 앰버는 그 무시무시한 예언을 떠올렸다. 바닥에는 정신을 잃은 남자가 엎어져 있었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온 늦가을의 싸늘한 바람에, 촛불이 춤을 추듯 이리저리 흔들리며 남자의 몸 위에 빛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빛과 어둠이 번갈아 가며 탄탄한 어깨와 널찍한 등을 훑었다. 비에 흠뻑 젖은 남자의 몸이 불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차디찬 남자의 기운이 앰버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앰버는 아무 말 없이 에릭을 쳐다보았다. 커다란 황금빛 눈동자에 수많은 질문이 담겨 있었지만, 에릭은 해줄 말이 없었다. 그저 성안에 쓰러져 있기에 데려왔다는 말 외엔.
「이 남자가 누군지 알겠어?」
에릭의 목소리가 퉁명했다.
「아뇨.」
「그럴 리가, 당신의 상징인 호박(앰버. 송진 따위가 땅에 묻혀 변화된 것으로, 일종의 보석. 주로 노란빛을 띰)을 지니고 있는데…….」
에릭이 엎어져 있는 남자를 발로 밀어 뒤집었다. 불빛과 빗물이 한데 어우러져 바닥으로 주르륵 미끄러지는데 앰버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남자의 가슴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호박목걸이…….
앰버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는, 남자 옆에 쭈그리고 앉아 목걸이에 촛불을 들이댔다. 목걸이를 걸고 있는 사람에게 신의 가호가 있을 거라는 문장이 룬 문자(고대 게르만인들이 쓰던 언어로, 마법의 힘을 지녔다는 글자)로 새겨져 있었다.
「영주님, 목걸이 좀 뒤집어 주세요. 뒤쪽에 뭐가 있는지 봐야겠어요.」
에릭은 목걸이를 뒤집어 보였다.
목걸이 뒤쪽에는 신의 영광을 찬미하고 축복을 바라는 내용의 기도문이 라틴어로 새겨져 있었다. 십자군 전쟁에 참가했던 기사들이 지니고 다녔다는 기도문이었다.
앰버는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흑마법사가 보낸 첩자가 아닐까 내심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분쟁의 땅’은 이름 그대로 영지 쟁탈전이 치열한 곳이기 때문에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앞에 쓰러져 있는 남자를 다시 살펴보았다.
강한 힘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남자였다. 살짝 말려 올라간 짙은 속눈썹과 윤곽이 뚜렷한 입술은 예외였지만.
연약해 보이는 구석은 좀처럼 찾기 힘들었다. 몸 여기저기에 긁히고 베인 상처와 멍 자국이 있었고, 오래 전에 생긴 듯한 흉터도 여럿 눈에 띄었다. 온몸에서 강인한 전사의 이미지가 풍겼다. 알몸에 목걸이만 하나 달랑 걸고 있다고 해서 만만하게 볼 상대는 아닐 듯했다.
「어디서 이 사람을 발견하셨어요?」
「스톤링에서.」
「네?」
앰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에릭을 쳐다보았다.
스톤링이라면 스톤링 성을 말하는 건가? 설마 성역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에릭은 더 이상 설명을 붙이지 않았다.
「사실대로 얘기 좀 해주세요! 제가 주리라도 틀어야 얘기하시겠어요?」
앰버가 화가 나 씩씩거렸지만, 에릭은 장난기 어린 웃음만 지을 뿐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엎어져 있는 남자를 훌쩍 뛰어 넘어가 문을 꼭 닫았다. 방 안에서 찬바람이 일시에 걷혔다.
「옛 친구한테 따끈하게 데운 와인 한잔 줄 생각을 안 하는군. 이 남자, 담요라도 한 장 덮어 줘야 할 거 같은데…… 홀딱 벗고 있으니 얼마나 춥겠어.」
「누구 명인데 거역하겠어요.」
비아냥거렸지만 목소리엔 애정이 가득했다. 자신은 일가친척 하나 없는 혈혈단신이고, 에릭은 스코틀랜드의 지체 높은 집안의 상속자인데도 앰버는 에릭이 편했다.
에릭이 망토를 벗어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를 덮어 주었다. 두툼한 망토가 남자의 몸을 간신히 가렸다.
「정말 거구로군.」
에릭의 입에서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영주님보다 더 크다니……, 누가 이 사람을 쓰러뜨렸는지 몰라도 대단한 기사인가 보죠?」
에릭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담요를 들고 다가오는 앰버를 바라보았다.
「벼락을 맞고 쓰러진 것 같애, 주변 흔적을 봐서는.」
벼락?
앰버는 남자를 자세히 보려고 한 발 다가서다가 잘못해서 잠옷자락을 밟았다. 순간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데 에릭이 얼른 몸을 잡아 주었다.
「어, 미안해.」
에릭은 재빨리 손을 떼며 사과했다. 앰버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떠올랐다.
「괜찮아요. 아니,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 이방인한테 넘어지느니 영주님 손에 잡히는 게 낫죠.」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지, 에릭이 앰버의 안색을 유심히 살폈다.
「참 희한하게도, 영주님 손이 닿으면 불편하긴 해도 아프지는 않아요. 영주님이 그다지 순결한 사람이 아니란 걸 하나님도 잘 아실 텐데…… 참 이상하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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