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여자라곤 나밖에 모르면서 어디서 여자를 잘 아는 척이야.”

“너도 나밖에 모르잖아. 나는 너만 알고 있어도 돼. 그러니까 너도 앞으로 계속, 나만 알고 있어.”

우리가 사랑에 빠진 순간은 언제였을까? 너무 오래되어서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런 ‘순간’은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늘 우린 함께였고, 모든 일을 함께 겪었다. 그래서 의문이 든다.

우리의 사랑은 진짜 사랑일까? 연민이나 동정은 아닐까?

“너한테 여자친구가 생기면 두 번째 자리는 나. 네가 결혼해서 아기를 둘 낳으면 다음 네 번째 자리는 나한테 줘야 한다고.”

“굳이 그렇게 순서를 정해야 해? 왜? 앨리, 소중한 건 그냥 다 소중한 거야.”

“아니야. 소중한 것에도 순서가 있어. 나는 이제 밀리는 건 싫다고. 그러니까 약속해.”

“앨리, 넌 언제나 내게 있어 첫 번째야. 내 안에서 네가 밀려날 일은 절대 없어.”

2. 작가 소개

정혜

착실한 청개구리

▣ 출간작

야차

달콤한 인생(eBook)

몸(eBook)

러브 크라임(eBook)

연담(eBook)

거절할 수 없는 제안(eBook)

3. 차례

Part 1

#1

#2

Part 2

#1

#2

#3

4. 미리 보기

그날 밤, 알렉스에게 총 다섯 명의 배우 프로필을 보여줬고 그중에는 웨스도 있었다. 나는 특별히 웨스의 아름다움을 잘 확인할 수 있도록 확대 사진을 여러 장 여러 컷 보여줬다.

“왜 이 친구만 이렇게 많이 보여주는 거야?”

“얘는 100퍼센트 2차 창작물에서 흥할 거거든.”

올해 스물네 살인 웨스 아믹은 소년 같은 청량함이 도드라지는 꽃미남으로, 고전미는 없었지만 청춘미는 있었다.

“애빙턴 드라마에서는 모든 커플이 나온다고. 백백, 흑백, 흑흑, 백동, 흑동, 동동,”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가면서도 말을 이었다.

“게이게이, 레즈레즈, 화목한 가족과 비극적인 가족, 입양 가족과 불임 가족, 신혼부부와 노부부.”

퇴근할 때 사온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통째로 들고, 스푼 두 개를 챙겨서 다시 알렉스 옆에 앉았다.

“심지어 이혼 부부까지 나오잖아.”

알렉스가 결 좋은 눈썹을 휘며 건네는 스푼 하나를 받아 들었다.

“그래서?”

“나는 웨스를 게이 커플에 넣고 싶거든.”

더할 나위 없이 딱이었다. 웨스는 그 역을 맡으면 100퍼센트 떴다.

“진짜로 성향이 그쪽이야?”

알렉스가 다시금 웨스의 사진을 들여다봤다.

“그는 완벽한 이성애자야.”

마초 물에 무한한 꿈을 품고 있는 웨스는 마초들의 성향답게, 여자에 환장했다. 그러나 어차피 연기는 자신의 성향과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법이다. 진성 게이는 스크린 안에서 애절한 이성애자가 될 수 있었고, 이성애자는 혹시나 할 만큼 완벽한 게이로 탈바꿈이 가능한 게 연기였다.

“봐봐. 티머시 플린도 그렇고, 로저 허턴도 게이 역으로 떴다구.”

둘 다 젊은 배우로 작년과 재작년, 10대 드라마에서 게이 커플을 각각 맡으며 얼굴과 이름을 날렸다. 모두 웨스와 비슷한 이미지로 한쪽이 선이 더 굵냐, 가느냐의 차이뿐이다.

“딴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불쑥, 알렉스가 헛소리를 시작했다.

“이렇게 여리여리한 게 취향인 줄은 몰랐는데……. 하긴, 넌 옛날부터 무지하게 나를 좋아했지. 눈이 이렇게 하트가 되어서는 나만 봤잖아.”

“……어이없네.”

기억도 없는 이야기를 사실처럼 하고 있었다. 아니, 알렉스가 웨스처럼 낭창한 미소년이었다는 건 사실이었다. 열다섯 살까지. 알렉스는 그저 길쭉하고 나뭇가지처럼 가는 몸을 지닌, 지나치게 새하얀 피부가 돋보이는 다소 계집애 같은 인상의 소년이었다. 그는 부친을 닮아 새카맣게 보이는 흑갈색의 머리카락을 지녔고, 반대로 눈은 모친과 닮은 쨍한 호수 빛의 청록색 눈이었다.

골격이 변화하기 시작한 건, 열여섯의 여름, 겨울. 혹독한 열일곱의 날을 지나, 열여덟 그 밤에 그는 어른이 되었다.

“내가 아니라 네가 먼저 나를 좋아했지. 물고기 똥처럼 나만 쫓아다녔잖아.”

반면, 나는 지극히 사실만을 나열했다. 앞에서 웃음이 피식 흘러나왔다. 조각 같은 그 옆선을 나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훑어보았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사랑에 빠진 순간은 언제였을까. 언제부터 이런 사이가 되었지? 너무 오래되어서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런 ‘순간’은 없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를 논하기 전부터 서로의 옆에 붙어 있었고 그것은 곧 당연한 일상이 되었기 때문에 뭔가를 자각할 새도 없었다. 모든 건 그저 정해진 순서처럼 흘러갔다. 자연스럽게.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그래. 그렇다고 치자. 여자들은 그런 거에 민감하니까.”

거만한 말투로, 멋진 얼굴이 관대하게 말했다. 그 얼굴이 굉장히 얄미웠기 때문에 나는 바닐라가 묻은 스푼으로 높은 콧등을 툭 때렸다.

“삼십 평생 여자라곤 나밖에 모르면서 어디서 여자를 잘 아는 척이야.”

알렉스가 빙글거리며 내 허리에 팔을 감았다. 밀어내듯 온몸으로 부딪혀 더 버티지 못하고 기우뚱 뒤로 같이 넘어갔다.

“너도 나밖에 모르잖아.”

가슴에 코를 박고 킁킁 개처럼 냄새를 맡은 알렉스는 곧 더욱 힘을 주며 껴안았다.

“나는 너만 알고 있어도 돼.”

목덜미에 파묻힌 얼굴이 얇은 살을 잘근잘근 씹다가 쪼듯이 목선을 타고 올라왔다.

“그러니까 너도 앞으로 계속, 나만 알고 있어.”

깊은 청록색 눈동자가 코앞에서 밀려 들어왔다. 익숙한 그 빛은 언제나 나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눈을 감고 다가오는 입술을 맞이했다.

“두 명 꽂아줄 거지?”

알렉스는 대답 대신 입을 크게 벌려 따끔할 정도로 내 입술을 깨물었다.

“……분위기 깨는 소리 하지 마.”

낮은 질책에 더 요구하지 않고 굵은 목에 팔을 감아 아래로 끌어당겼다. 신음마저 삼켜 먹는 키스 중에 문득, 꺼내놓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떠올랐지만 점점 열기를 띠어가는 애무에 아무래도 좋을 기분이 들어 그냥 지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