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눈을 뜨자 수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어렵게 눈을 떴는데도 보이지 않았다. 숨을 내쉬며 어둠속에서 눈이 익숙해지자 이내 그녀의 익숙한 방이 보이기 시작했다. 또 꿈을 꾸었다. 언제나 비슷하고 언제나 생각이 잘 나지 않는 무서운 꿈. 평온하던 일상이 이 악몽으로 인해 한 번씩 파장을 일으킬 때마다 수인은 그 무서움을 온전히 혼자 버티고 있었다.'시계를 보니 새벽 3시였다. 기운 없이 이불 위에 누워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금방 깊은 잠에 들었다. 악몽의 여운이 있으련만 그녀는 이젠 담담해진 듯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수인은 그랬다. 가슴 깊이 상처를 잘도 숨기고 웃으며 그 상처를 단련시키고 그로 인해 그녀에게 다가올 파장마저도 철저히 막으며 그렇게 자신을 지키고 있었다. 상처로 인해 자신이 약해질 일은 없다고 그녀는 그렇게 다짐을 하곤 했기 때문이다. ''“수인아, 너 영어 숙제 다 했어?”'“응. 내가 시험은 잘 못 봐도 숙제는 꼭 해 오잖아. 맞는 게 얼마나 아픈데 숙제를 안 하냐? 넌 안 했어?”'“응. 그냥 할 걸 그랬어. 혹시나 하고 안 했는데 다른 애들은 거의 했나봐.”'“장난해? 영어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면서. 너 배짱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깐.”역시나 수인의 친구 영주는 영어 시간에 확실히 혼이 났고 점심시간이 됐는데도 한참 나와 있는 영주의 입은 여전히 심술에 들어갈 줄 모르고 있었다. '“으그…… 내가 못 살아. 영어는 왜 이렇게 아프게 때리냐? 얼굴에 심술은 가득해 가지고. 이 연약한 여학생을 어떻게 그렇게 무지하게 때릴 수 있는지 진짜 신기하다. 내가 꼭 의대 들어가서 그 인간 머리 해부해 보는 게 꿈이다.”'“그래 꿈이니깐 다행이다. 네가 의대 들어가는 건 조금 힘들지 않겠어?”'맞장구치며 수인이 영주를 놀리자 나와 있던 영주의 심술은 점점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그러지마. 볼 터지겠다. 심술 터지면 약도 없는데.”'수인과 영주는 깔깔 거리며 도시락을 덮고 교실을 나오고 있었다.'“참 수인아, 너 이번 주에는 내가 주선하는 소개팅 좀 해라. 저번 주에는 소라가 해 준 미팅 했다며. 이번에는 내가 주선하는 거 해줘. 시간 되지?”'“그래. 알았어. 대신 알지? 나 시간 많이 안 보내는 거. 또 내 연락처 중간에서 가르쳐 주기도 없는 거.”'“아, 인간이. 야 내가 고등학교 생활 3년 동안 너한테 한 달이면 두 세 번씩 이 철칙을 들었다. 근데 또 얘기하니? 아, 진짜 너 독하다.”'영주는 수인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영주의 말에 수인은 크게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사는지 가끔씩은 스스로를 설득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바뀌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아무리 남자들을 만나 봐도 특별한 감정도 어떠한 떨림도 없는 걸. 수인은 확인하고 싶었다. 자신이 남자로 인해 달라질 여자가 아니란 걸 계속 확인하고 싶었다. 만약 그녀 앞에 가슴이 뛰면서 오직 한 남자만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남자가 나타난다면 언제든 사랑이란 걸 해 보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렇게 자신을 남자들 앞에 내 보이면 보일수록, 그녀는 실망만 더해갔다. 아무도 어떤 잘난 남자도 그녀의 심장을 뛰게 하는 사람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