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눅눅해서 그런지 몸까지 찌뿌듯하네. 하긴, 이런 오래 된 다세대주택이니. 베란다도 없고, 빨래도 이불도 제대로 햇볕을 보여 줄 수가 있어야지.”'강산은 일주일 전에 이사 온 집이 갈수록 맘에 들지 않아 짜증이 나고 있었다. 더위가 끝나갈 8월의 마지막 주인데도 집은 꽤나 더웠고 베란다가 없는 이층집이 갑갑하게만 느껴졌다.'“그러게 그냥 하고 싶은 대로 추진했어야 했어. 괜히 무리하게 일 벌렸다가 빚만 졌잖아. 에휴, 누굴 원망하냐. 귀가 얇았던 내 잘못이지.”'처음엔 친구인 산호를 원망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그가 사인을 했고 그가 추진했던 일이었다. 지난 일을 깊게 생각하는 성격의 강산이 아니건만, 처음으로 실패를 겪었기에 잊는다는 건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일주일 전만해도 꽤나 넓은 오피스텔에서 살던 강산은 무리하게 확장하려던 사업 때문에 빚을 져 자신의 소유였던 BMW가 새겨진 1년밖에 안 된 차와 오피스텔을 팔고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처음에 봤을 때는 집이 깨끗하고 조용한 것이 저렴한 가격에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1층은 주인 내외가 살고 있었고 2층과 3층은 세입자들이 쓰고 있었다. 서로의 사적인 공간을 침범할 것도 같지 않았고 집도 볕이 잘 들어 좋을 것만 같았다. 3층에도 혼자 사는 사람이고 주인집 내외분들도 인상이 좋아 강산은 바로 계약을 해 버렸었다. 하지만 아무리 깔끔한 성격의 그라도 결혼도 안 한 총각의 눈이 다 그렇듯 갈수록 집의 단점들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볕이 잘 드는 바람에 집은 하루 종일 찜통을 벗어나지 못했고 창문을 모두 열어도 구조상 맞바람이 쳐지지 않는 상황이니 한여름의 더위에서는 최악의 상황이 되었다. 모처럼 쉬는 일요일인데 매일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는 집에 익숙해 있다가 선풍기 한 대 틀며 가만히 방에 있으려니 슬슬 올라오는 짜증에 강산은 참기가 어려웠다. 폼생폼사를 외치며 사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혼자 있어도 마구 망가진 모습을 하는 그는 아니었다. 아니 망가진 모습을 하고 있어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 매력남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까. 하지만 지금의 강산의 모습은 더위에 지친 짐승과 비슷하게 잔뜩 곤두서 있는 모습이었다. 더운데다가 습한 기온 때문에 짜증이 일던 강산은 결국 벌떡 일어나 거실에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청소라도 해 봐야지, 도저히 못 참겠네.”'걸레를 꼭 짜서 바닥을 닦고 창틀의 먼지를 닦고 화장실도 세제를 풀어 여기저기 솔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집안에서 청소를 하던 강산은 통에 물을 받아 나와 계단에 시원하게 뿌렸다. 뿌듯한 마음에 집 안으로 다시 들어온 강산은 깨끗해진 집 안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다 자신의 방 침대에 시선을 멈췄다. 매일 밤 자신의 온몸에 감겨 동고동락하는 커버와 베개를 뽀송뽀송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방법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고민하던 강산은 결국 1층에 위치한 주인집의 벨을 눌렀다.'“무슨 일이야? 총각?”'평범한 인상의 아줌마가 얼굴을 내밀자 그 뒤에 따라오는 에어컨의 시원한 냉기가 강산의 얼굴을 스쳤다.'‘어! 허. 이 얼마 만에 맛보는 상쾌함이냐.’'“저기, 아줌마. 이불 좀 널 때 없을까요? 너무 눅눅해서요. 빨래 널기도 그렇고.”'“아. 이층이 좀 그렇지? 전에 살던 새댁은 창문들 다 열어 놓고 볕 좋을 때 그냥 집에서 말리기도 하던데. 하긴 총각이 그렇게 살기는 그럴 테고. 그럼, 옥탑방 앞에 빨랫줄 있으니깐 거기에 널어봐. 널기 전에 옥탑방에 사는 사람한테 한 번 물어보고.”'“옥탑이요?”'강산은 왜 자신의 바로 위를 생각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씨익 웃었다. 처음 이사 오던 날 궁금해서 올라가 보았던 3층의 옥상은 꽤 넓었었다. 그리고 뒤에 있던 옥탑 방도 생각이 났다. '“그래도 돼요?”'“그거야 옥탑방 사는 사람이 오케이를 해야 되는 거지.”'“근데 지금 사람이 있을까요? 누가 살아요? 혼자 사는 사람이라고 하셨는데 남잡니까?”'“글쎄. 아까 나가는 거 같던데. 그리고 남자가 아니고 여자야. 말로는 그냥 혼자 산다고만 했거든. 요즘 젊은 사람들이 꼬치꼬치 물으면 싫어하니깐 자세히는 모르는데 어쩐지 이혼한 사람 같아. 왜 사람이 내 나이쯤 되면 그런 게 그냥 보인다고 하잖아. 안 그럼 혼자 사는 처녀가 왜 어린 아이 장난감을 가지고 있겠어? 안 그래? 그냥 보면 고와 가지고 딱 아가씨인데 또 방세 받으러 올라가 살림 하는 거 보면 영락없는 애기 엄마 같아. 그러니 나도 아가씨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어떨 때는 새댁 소리가 나와 버린다니깐. 요즘은 여자들이 잘 꾸미고 다니니깐 도무지 헷갈려서. 에고, 주책이라고 하겠네. 난 그냥 혹시나 총각이 실수해서 같은 집에 사는 사람끼리 얼굴 붉힐까 하는 얘기여. 눈치껏 기분 맞춰 줘야 총각도 이불 편하게 널 수 있지.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아싸! 강산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3층에 사는 여자가 아줌마든 아니든 그는 이불을 널 수만 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기대감에 부풀어 강산은 열심히 계단을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침대 커버와 얇은 면 이불을 들고 3층 계단으로 다시 뛰어 올라갔다. 계단 몇 개를 올라 왔을 뿐인데 바람이 훨씬 시원했고 넓은 동네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시야에 다 잡힐 정도로 전망도 괜찮았다.'“우와. 끝내주네. 바람도 시원하게 불고. 야! 여기서 삼겹살 구워 먹으면 최고겠다.”'강산은 잠시 내려다보던 시선을 뒤로 돌렸다. 빨랫줄이 눈에 들어오자 신이 난 아이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흐흐.”'강산은 빨리 널고 싶은 생각에 옥탑방의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분명 안쪽에 문이 하나 더 있어 듣지 못했나 싶은 마음에 힘차게 문을 흔들고 두들겼다. 그런데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진짜 나갔나본데?”'강산은 뒤돌아 빨랫줄 앞에 섰다. 분명 여자 것으로 보이는 박스 티셔츠와 반바지, 그리고 식탁보 같은 것이 널려 있었다. 그 빨래들이 널리고도 빨랫줄은 넓었다. 자신의 침대 커버와 이불을 좁게 널 수도 있을 거 같았다.'“에이. 모르겠다. 어차피 남아도는 빨랫줄인데 아무리 까칠한 성격이라도 뭐라고 하진 않겠지. 그래!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