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이 불타고 있었다. 아름다운 장식이 새겨져 있던 벽과 초록색 지붕은 무너져내렸다. 아이들이 이리저리 달려가고 사방에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른다. 무기와 무기가 부딪히는 소리와 병사들의 함성이 들린다. 잡아라, 잡아서 다 죽여버려! 단말마의 비명, 말발굽소리, 끔찍한 웃음소리.'안 돼, 여기서 죽을 수는 없어.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난 아직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했는데. 그가 돌아오는 걸 봐야 해. 그는 돌아올 거야, 그렇지? 그러니까 살아야 해. 살아남을 거야!'“움직일 수가 없어.”'방에 주저앉아 있던 여자가 흐느끼며 말했다. '“그분한테 가야 해, 그분한테. 그러면 다 해결될 거야. 응?”'여기서 거기까지? 그들이 어디 있는 줄 알고 간단 말인가? 그것도 우리 둘이서? 불가능하다. 절대로 할 수 없어. '금속음은 더욱 가까워졌다. 병사들이 다가온다.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울부짖었다. 머리와 옷에 불이 붙은 어린아이 하나가 바닥에서 뒹굴다가 늘어진다. 아무도 아이를 돕지 않는다. 모두가 도망치느라 바쁘다. 불룩한 배를 안고 있는 그녀에게도 다가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밖에 없어.'“가자, 응?”'가고 싶지 않아. 난 그냥 혼자 도망치고 싶어. 자신이 없다고.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하지만 그가 부탁했다. 그녀를 잘 돌봐달라고 그가 부탁했다. 그러니까 해야만 한다.'“그래, 가자.”'그녀를 붙잡고 간신히 일으켜 세운다. 반쯤 늘어진 그녀는 너무나 무겁다. 두 사람의 무게라는 게 이렇게 무거운 건가? 걸음을 옮기기도 힘들다. 치솟는 불길에 얼굴 여기저기가 뜨겁다. 눈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망할 놈의 머리카락, 단 한 번도 정리해놓은 대로 가만히 있는 적이 없다!'“가자.”'다시 한번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긴다. 금방이라도 땅으로 가라앉을 것만 같지만 해야만 한다. 그가 돌아오면 한마디 칭찬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그가 돌아오면, 그가 돌아오면…….''숨을 쉴 수가 없어.'소진은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순식간에 온몸이 싸늘해졌다. 손가락도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침착해야 해. 차분하게, 하나씩하나씩.'“아, 아.”'목소리는 정상이다. 목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귀도 정상이다. 눈을 몇 번 깜박인 다음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침대 옆의 협탁을 더듬었다. 스탠드 스위치가 느껴진다. 스위치를 꾹 누르자 빛이 번쩍 들어온다. 눈앞이 잠시 새하얗게 변했다가 서서히 시력이 돌아왔다. 멀쩡하다. 그저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길게 한숨을 내쉬고서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뭐야, 나잇살이나 먹어가지고.”'그녀는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식은땀이 온통 배어 있었다. 소맷자락으로 꾹꾹 닦아낸 다음 무릎을 세우고 턱을 기댔다. 맞은편 벽에 걸려 있는 시계는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저녁 여덟 시에 자고서 이제 일어나다니 일은 언제 할래, 정소진.”'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툭 치고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할 일이 많은데 내처 자버린 모양이다. 그러니까 악몽 따윌 꾸는 거야. 그런 건 이제 졸업할 때도 됐잖아? 나이 서른이 넘었는데, 아직도 어린애처럼 한밤중에 눈이 안 보인다고 비명을 지르며 깰 수는 없는 노릇이다.'뻐근한 몸을 조금 움직인 다음 그녀는 컴퓨터 앞으로 갔다. 컴퓨터 주변에는 수많은 책이 널려 있었다. 자료로 쓰느라 자주 펼쳐보는 책 사이에는 메모지가 수두룩하게 끼어 있고, 책상 앞에 코르크로 고정시킨 일정표에도 여러 개의 메모가 꽂혀 있었다. 내일 모레까지 다음 회 대본을 넘겨야 하고, 소설 마감시한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런 시기에 소설 마감까지 잡은 건 역시 무리였다.'컴퓨터를 켠 그녀는 의자에 기대 멍하니 부팅 화면을 바라보았다. 윈도우즈 로고가 뜨고, 잠시 기다리자 메인 화면이 떠올랐다. 아이콘을 클릭한 다음 그녀는 쓰던 원고를 불러왔다. 화면에 제목이 떠오른다.'‘주작의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