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도 출중하시고 행색을 보아도 귀한 집 자제분이신 게 분명한데, 팔자가 기구하다면 얼마나 기구하겠습니까?”'“보이는 것이 다는 아닌 게지.”'“그렇습니까.”'조용하고도 나긋한 목소리의 동화가 왠지 편안하게 느껴진 륜은 자신의 신세 한탄을 시작했다.'“집안이야 좋다지만 내 18세에 혼인을 해 다음해에 처가 병사하더니, 재혼만 하려 하면 일이 터져 혼사가 무마되더구나. 아마도 내 팔자엔 처복은 없는 모양이다.” '륜은 자신의 한탄을 열심히 들어주는 동화의 반응이 재밌어서, 좀 더 거짓말을 좀 보태 그녀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결심했다. '“게다가 과거에 낙방한 지 여러 번. 지금은 글공부를 포기한 채 별로 하는 일 없이 놀고 있는 한량에 불과하니, 내 처지가 한탄스럽구나.”'그가 한량이건 아니건 그 순간 동화의 귀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처가 병사하고, 과거낙방이란 말만이 귓가에 메아리칠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 선비가 연형님이 말했던 팔자가 센 아니, 기가 센 남자란 말이렷다.’'그를 바라보던 동화의 눈빛이 희망으로 환하게 빛나는 걸 보지 못한 륜은 계속 말을 이었다. 한번 시작하자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고민이 술술 입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내 기방에서 육욕이라도 풀어보려 하는데, 결벽증(潔癖症) 때문에 기녀도 제대로 안지도 못하겠구나. 그러니 네 말대로 방중술이 미비한 것은 물론이요, 친우들 간에 남색을 좋아한단 소문까지 날 정도이니, 내 춘화도와 음란야담집을 통해 교합을 하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방법과 기술을 좀 알아보려던 참이다.” '동화는 열심히 그의 말을 들어주면서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요즘 ‘소설’이란 사람의 야담집이 유명하여 근래에 한 권 구해 읽었는데, 아주 마음에 들어 찾으려니 이미 다나가서 구할 수가 없더구나. 밖에선 사람들의 이목이 있으니, 이곳이 구하기가 쉬울 것 같아 찾은 것이다.” '“결벽증이라 하면…….” '‘그녀도 기녀인데, 돈만 주면 아무나 안는 기녀가 불결하여 차라리 혼자 해결하는 게 낫다고 고백할 수는 없지 않은가!’ '륜은 어찌 돌려 말을 해야 하나 고민 중에 동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혹, 기녀들이 불결하게 느껴진단 말씀인지요?”'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꼭 집어 말하자 륜은 고개를 끄덕였다.'그의 고민을 다 들은 동화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한 손을 왼 가슴에 댄 채 빠르게 벌렁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분장한 모습으로 지금 하고자 하는 일이 잘될지 의문이었다. '“그러니까, 나리께선 기와 팔자가 세단 말씀이신지요?”'“뭐,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그렇군요. 그렇다면 기적에 오를 때가된 동기(童妓)의 머리를 올려주시고 관계를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정말 시원한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허허, 지금까지 왜 그런 생각을 못했단 말인가!’ '“그렇담 저와 거래를 하지 않으시겠습니까?”'“거래라? 무슨 거래를 말하는 것이냐?”'뜬금없는 동화의 제안에 륜이 되물었다. '“선비님께서 제 머리를 올려주십시오.”'그녀의 당돌한 말에 륜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 동화란 여인이 아마도 지금까지 그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성정이 대담하고 용감무쌍(勇敢無雙)한 여인이 아닐까 싶었다. '“하하하! 기생자질이 다분하구나. 대놓고 머리를 올려달라니.”'“저도 나리가 아니면 아니 되기에 드리는 말입니다.”'동화의 말이 륜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게 무슨 뜻이더냐?”'“제가 기생이면서도 머리를 올리지 못한 것은, 기가 세고 팔자가 세단 연유로 지금까지 저와 몸을 섞을 만한 기와 팔자가 센 남자를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비님 정도면 저와 만만치 않을 성싶습니다.”'륜은 짙은 일자눈썹에 검정깨를 확 뿌려놓은 듯한 주근깨, 또 코 옆에 우스꽝스런 점까지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박색이긴 해도 잠깐 닿았을 때의 달콤함을 떠올리니 륜은 그녀의 제안에 은근히 구미가 당기기도 했다. ‘게다가 닳고 달은 기녀가 아니라니 불결함을 느낄 필요 없이 마음껏 육욕을 풀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또한 이런 제안을 대담하게 할 수 있는 그녀 자체가 아주 흥미로웠다. '“네 말대로 동기들도 있는데, 내가 네 머리를 올려준다고 해서 얻는 게 무엇이란 말이냐?”'입가에 살짝 미소를 띤 동화가 륜의 옆으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귀가에 조곤조곤 속삭였다. 그런 그녀에게서 은은한 난향이 풍겨 나왔고, 귀가를 간질이는 따스한 입김에 잠시 그의 정신이 몽롱해졌다. '“선비님께선 저와의 연습으로 기가 막힌 방중술을 익히실 수 있겠지요. 또 여인의 마음을 얻는 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처음 한다는 주제에 기가 막힌 방중술을 익혀주겠다니, 륜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하는 짓이 귀엽군. 아주 재밌어.’ '“또?”'“음, 원하시는 책자를 모두 구해드리겠습니다.” '“그럼, ‘소설’의 책자를 모두 구해줄 수 있다?”'“그리하겠습니다.”'륜은 동화의 자신감에 뭔가 알아낼 수도 있겠다는 예감을 받았다. '“대신…….”'“대신?”'“선비님께선 앞으로 스무날을 저에게 주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