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팔봉 오빠, 그만 좀 해! 내년이면 고등학생 될 사람이 새까맣게 어린 동생이나 괴롭히는 게 부끄럽지도 않아? 유민이 계속 괴롭히면 그냥 우리 집으로 데려가서 살 거야!”'“작은 기린, 니가 뭔데 내 동생을 데려가? 그리고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어. 너 진짜 나한테 한 번 제대로 맞고 싶냐?”'“그럼 뭐라고 불러? 야라고 부를까, 너라고 부를까? 팔봉이보다는 그게 낫나?”'“이린, 넌 오늘 죽었어!”'열린 창문 너머로 쩌렁쩌렁한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2층 서재에서 책을 고르고 있던 지민의 얼굴이 정원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세 살 터울 형 팔봉의 얼굴만큼이나 구겨졌다.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꼭 닫자 소음이 조금 줄어들었다. 자신의 별명인 작은 기린처럼 펄쩍펄쩍 도망 다니는 린을 팔봉이 죽어라 쫓아다니고, 여덟 살배기 유민이 양손으로 눈가를 쓱 훔치면서 히죽히죽 구경하고 있었다. 아주 낯익은 풍경에 지민의 입에서 짜증스런 한숨이 새어나왔다. 지민은 안락의자에 앉아서 바깥 소동에도 아랑곳 않고 독서에만 열중인 린의 쌍둥이 오빠 기에게 돌아섰다.'“니네가 세트인 건 이름만 봐도 누구나 다 알겠지만, 우리 집에 올 땐 쟤 좀 데려오지 말라니까.”'“자다가도 여기만 온다고 하면 맨발로 뛰쳐나오는 애를 어떻게 집에 잡아둬? 린이 꼬마였을 때부터 유민을 친동생처럼 끔찍이 위하는 거 너도 알잖아. 요샌 불쌍한 유민이 데려다 키워야 한다고 부모님께 시도 때도 없이 졸라대기까지 한다니까. 정말로 유민이 우리 집에 빼앗기기 전에 너나 형이나 동생한테 잘 좀 해줘라. 수민인 예뻐하면서 둘 다 왜 유민인 못 잡아먹어 안달이냐? 너무 남녀차별 아니야?”'기가 한참 아래 동생을 타이르듯 설교를 늘어놓았다. 다른 누군가가 이런 소리를 늘어놓는다면 더러운 성깔을 진작 부려댔을 지민이지만, 속마음까지 터놓는 유일한 벗인 기에게는 무심히 어깨만 으쓱거렸다.'“무슨 남녀차별씩이나……. 수민이야 미운 일곱 살은커녕 너무 예쁜 짓만 해서 탈이지만, 유민인 자꾸 매를 벌 짓을 하니까 그렇지. 하지만 난 별로 유민이 괴롭힌 적 없어, 문제는 성격 요상한 형이야.”'“내가 보기엔 너도 만만치 않아. 물론 형이 훨씬 심하긴 하지만……. 형은 남들한테는 안 그러면서 왜 집에만 오면 식구들을 들들 볶는지 정말 이해가 안 돼.”'기가 들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떨어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친구인 큰 기린을 잠시 쳐다보던 지민은 밖에서 뛰어다니는 작은 기린에게 시선을 돌렸다.'기, 린 쌍둥이는 할아버지 김갑봉의 오랜 친구이자 가족 주치의인 이 박사의 손자손녀였다. 심통 맞은 성격의 갑봉과 죽마고우인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 박사는 점잖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못 이룬 수의사의 꿈 대신에 아들과 손자손녀의 이름을 좋아하는 동물로 짓는 등, 가끔씩 유별난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이 안날 정도로 이 박사네와 김씨 집안은 한가족처럼, 같은 피붙이처럼 지내왔다. 5년 전 지민의 부모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세상을 뜰 때도 누구보다 큰 힘이 되어준 또 다른 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