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프롤로그

나 한서율은 어느 날 운이 없게도 사고사를 당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내 생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눈을 뜨자 침대에 누워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소설 『루베트 잉그제트의 정원』의 악녀인 시아나 잉그제트에 빙의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다섯 명의 황녀 중 5황녀였던 시아나 잉그제트는 여황제 자리에 오르기 위해 1황녀인 루베트 잉그제트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훗날 모든 사실이 밝혀지며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인물이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시아나 잉그제트로 빙의가 됐던 첫날, 모든 것이 어색했던 나머지 거울 앞에 서서 한동안은 자신의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소설 속에서 묘사가 된 것처럼 얼굴은 작고 매우 아름다우나 긴 속눈썹에 그리 밝지 않은 애매한 갈색 머리카락, 평수는 매우 넓으나 고요하다 못해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을 것 같은 이상한 이질감이 느껴지는 침실까지…….

나는 죽기 전날 밤 소설의 중장까지 읽었기에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시아나 잉그제트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다만 나는 자신이 하필 시아나 잉그제트가 됐다는 사실에 대해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위험한 행동을 많이 벌이다가 단명했으며, 평소 자신의 성격과는 맞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시아나 잉그제트가 됐다는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시아나 잉그제트의 기억도 읽을 수 있었고 이곳에서의 언어도 잘 통했기 때문이다.

‘악녀이기는 하지만 악행을 벌이지 않는다면 조용히 오랫동안 살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의 악녀는 보통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여기서도 또 단명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싫다.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아프다가 죽는 것은 싫으며, 그저 노년을 즐기다가 조용히 잠이 든 채로 죽는 게 가장 편안한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전 생에서도 단명했기에 새로운 생에서는 장수하고 싶다는 열망이 컸다. 그렇기에 나는 시아나 잉그제트가 된 후 새로운 삶에 적응을 한 뒤, 한 달 동안 방에 틀어박혀 독서만 하며 정말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냈다.

내가 태도를 바꾸고 마음가짐을 달리 먹는다면 악녀인 시아나 잉그제트의 운명 또한 충분히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황녀 전하!”

그때 시녀 한 명이 내 방으로 헐레벌떡 들어왔다.

“오늘 아침 신탁이 있었다는데, 내용이 너무 흥미로워요!”

“신탁 내용이 뭔데?”

어느 정도 황궁에서의 삶이 익숙해지기는 했으나, 나는 지금이 소설에서의 어느 시점인지는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현 황제를 이을 다음 황제는 여자가 아닌 남자라고 하던걸요? 그래서 지금 황궁이 발칵 뒤집혔어요!”

“아, 그러니?”

“별로 놀라지 않으시네요?”

나는 잠시 손가락을 입에 물고는 고민에 빠졌다.

두근두근!

‘조금 더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신탁 내용이 빨리 찾아왔구나…….’

“황녀 전하?”

“아, 아니야. 난 괜찮아.”

<다음 황제는 여자가 아닌 남자가 될 것이다.>

이 신탁은 소설 『루베트 잉그제트의 정원』의 도입부이자 모든 비극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속의 황제의 이름은 디그롬 잉그제트이며, 이 황제에게 아들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이 나라에서는 꼭 다음을 이을 왕이 남자여야 한다는 법은 없으며, 선대에 몇 차례 여황제가 존재했다고 하니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그렇지만 신탁에서 다음 황제가 여자가 아닌 남자라고 한 것은 그저 웃어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 나라에 후계를 이을 남자가 없기에, 신탁의 말이 확실하다면 반란이 일어나거나 황태자가 탄생한다는 것인데 황후는 몇 해 전 병사해 현재 황후전의 주인은 공석인 상태였다.

나는 신탁의 내용으로 황궁이 시끄럽다는 것부터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황녀들이 황궁으로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 또한 시녀를 통해 전해 들었다.

‘이제부터가 중요해.’

여황제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시아나를 파멸로 이끌었기에, 나는 소설 속 이야기와는 반대의 삶을 살 생각이다.

아무리 이야기 속에서는 악녀라고 하지만 아직 본격적인 악행을 저지르기 전이다.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 착하게 산다면 비극적인 죽음이나 슬픈 결말 따위도 없을 것이다.

“황녀 전하!”

반나절이 지나자 아침에 찾아왔던 시녀가 방에 들어와 다시 말을 걸었다.

“왜 그러지?”

“황제 폐하께서 속히 본궁으로 입궁하시라는 소식입니다!”

“그래? 알았어.”

나는 반나절 동안 침대에 누워 잠이나 자며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않았다.

“어? 그러고 보니 요즘 황녀 전하께서 책을 읽고 계신 거 너무 신기해요.”

“읽다 보니 재밌더라고.”

탁!

오늘 밤 황궁에 제1황녀 루베트를 제외한 네 명의 황녀들이 모인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기에, 책을 읽으며 마음을 정리하고 어떤 식으로 대응을 해야 할지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내가 방 밖으로 나오자 여러 시녀가 모여들어 내 몸을 정갈하게 씻겼다. 그리고 최고급 드레스를 내게 입힘과 동시에 굽이 높은 구두까지 신겼다.

어색하고 부끄러우며 민망하지만 이제 황녀가 됐으니, 이 또한 순응하며 받아들여야 한다. 신탁이 내려왔으니 황궁에서의 본격적인 암투가 시작될 것이며,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나는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를 내며 본궁으로 향하는 카펫을 밟아 나갔다. 이미 기다란 식탁을 가운데에 두고 황제와 황녀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시아나 왜 이렇게 늦었느냐?”

“독서를 하느라 조금 늦었어요, 아바마마.”

“하하하! 네가 독서를?”

소설 속에서도 몇 차례 언급되어 나오지만, 시아나 잉그제트는 독서보다는 운동이나 사냥을 좋아하는 인물로 묘사되어 나온다.

아마도 그렇기에 시녀도 황제도 내가 독서를 했다는 사실을 무척이나 놀란 모양이다. 다만 내 작은 행동이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에도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걸 깨닫고는 더욱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오늘은 고기가 조금 차가운 거 같네요.”

“소피아, 너는 왜 이리도 입맛이 까다로운 것이냐?”

“저는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를 한 거예요.”

황제와 친구처럼 대화를 주고받는 저 인물은 바로 2황녀이자 가장 성격이 좋은 걸로 나오는 소피아 잉그제트이다.

루베트와 시아나 사이에서 갈등이 커지자 중재자 역할을 하며 나름 안정을 도모하려고 하지만, 시아나의 욕망이 커질수록 시아나와 소피아 사이의 거리 또한 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