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중에서-

멍하니 저벅저벅 힘겹게 걸어가던 그녀의 눈앞에 근래 보기 드문 공중전화가 나타났다. 그것을 본 순간 미노의 심장이 다른 의미로 쿵쾅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분히 충동적으로 공중전화부스를 열고 들어갔다.
요사이는 누구나 휴대전화를 갖고 다녀서인지 공중전화박스 안은 무릉도원처럼 세상과 격리된 듯 조용하고 한적했다. 미노는 수화기를 들고 지우고자 애를 썼지만 머릿속에 각인되듯 박혀있던 번호를 기계적으로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고 가슴을 뜨끔하게 하는 목소리가 울렸다.
-여보세요.
그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넘어온 순간 뜨거운 기운이 뭉치로 넘어와 컥 목이 멨다.
-여보세요. 미노 씨, 말해요, 당신인지 다 알고 있으니까.
어떻게 알았냐고, 내가 여보세요, 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난 줄 알았냐고 묻고 싶었지만, 여전히 뜨거운 뭔가가 목구멍을 꽉 막고 있어 미노는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전화 받자마자 당신인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죠? 이 번호 당신밖에 모르는 번호예요. 그래서 당신인 줄 안 겁니다.
-…….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내가 별로 감동을 주지 못한 것 같군요.
-…….
-계속 말하지 않을 겁니까? 좋아요, 그럼, 내가 혼자 말할게요. 미노 씨라면 제일 먼저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겠죠? 흠, 난 잘 지냅니다. 서울로 돌아와서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운동하고……. 처음 당신이 떠나고 조금 힘들었지만 뭐, 곧 예전의 나로 돌아와 아주 잘 살고 있습니다. 당신도 그렇겠죠?
-…….
-아, 그렇다구요? 그래요. 미노 씨는 아마 그럴 겁니다. 강하고 씩씩한 여자니까. 참, 나 수영 다시 시작했습니다.
-…….
-왜 조깅은 안 하고 수영을 하냐구요? 조깅, 할 수가 없더라고요, 서울에서는. 공기가 너무 나빠서 새벽에 헉헉대고 뛰고 나면 폐가 타는 것 같았거든요. 아, 그때 동백섬에서 조깅할 때가 정말 좋았는데…….
-…….
-또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요?
-…….
-정말 없나보네. 난 미노 씨 어떻게 지내는지 뭘 하고 있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정말 많이 궁금한데.
-…….
-계속 그렇게 침묵만 지킬 겁니까?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나한테 전화를 했으면 뭔가 목적이 있을 것 아닙니까?
-…….
-말 해봐요, 왜 나한테 전화했습니까?
-……보고……싶어서요.
-…….
-목소리, 듣고, 싶어서요.
침묵이 흘렀다. 그도 그렇고 그녀도 그렇고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네 호흡이 이어지고 도우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휘유, 지금 미노 씨가 나한테 보고 싶다고 한 거 맞습니까? 와아, 이렇게 선방을 날리다니, 안 본 사이에 미노 씨 너무 솔직해진 거 아닙니까?
-솔직해져야 할 것 같아서요. 이게 도우 씨에게 걸 마지막 전화니까.
-휴우……마지막이라……그거 함부로 말하는 단어 아닌데.
-그동안 고마웠어요.
-자꾸 도망치려고만 하는 군요, 미노 씨는.
-나한테 남은 선택이란 건 없어요. 애초부터 없었어요.
-아뇨, 선택이란 어느 상황에서든 있습니다. 단지 당신이 다른 선택을 못할 뿐이지.
-다른 선택? 저도 그런 게 있었으면 좋겠네요. 당신은 지금 내가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해요.
-아뇨, 당신이 왜 도망치는 지 압니다. 조필립, 그 남자 때문이죠?
-……당신이 모르길 바랐는데……. 결국 알아냈군요. 그럼 이것이 왜 당신과 나의 마지막 전화가 될 건지도 다 아시겠군요.
-그래요, 하지만 미노 씨도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뭔가요?
-이제 그런 이유로 당신이 도망 다녀야 할 필요가 없다는 거요. 내가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미노는 피식 웃었다.
-제 생각에 아직 도우 씨가 다 모르고 계시는 것 같네요. 난…….
-아뇨, 다 압니다. 미노 씨가 한사코 내게서 도망치는 이유, 날 위해서라는 거……. 다 압니다. 하지만 난 당신이 납치범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휴우, 정말 편의점에서 셜록 호움즈 놀이를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당신은 정말이지 맘을 놓을 수 없는 남자로군요, 벌써 나와 재형이 사이까지 알아낸 건가요?
-그러니까 이제 혼자 그 무거운 짐 지며 고생하지 말고, 나한테 와요.
-아뇨, 안 돼요. 그렇게 되면 당신은 나 때문에 엉망이 돼요. 난 당신까지 내가 있는 이 지옥 같은 구렁텅이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당신이 날 떠났던 거 압니다. 하지만 미노 씨 이제 그럴 일 없을 겁니다. 내가 당신을 그 지옥에서 구해줄게요.
하하하, 하고 미노가 히스테릭하게 웃었다.
-도대체 어떻게요? 네? 재형이는 필립의 친아들이에요. 난 아버지 몰래 아이를 빼낸 나쁜 여자구요. 그런데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날 구해주겠다는 건가요?
-……방법이 있을 겁니다, 분명히. 지금 나름대로 열심히 알아보고 있는 중이니까 조금 있으면…….
-도우 씨, 제발 그렇게 애쓰지 말아요. 오늘 내가 전화한 이유는 그저 마지막으로 당신한테 고맙다는 말, 그 말을 하고 싶어서예요.
미노는 숨을 크게 한번 들이쉬고 이어 말했다.
-부산에서 도우 씨랑 같이 있었던 그날들, 잊지……못할 거예요. 죽어도.

출간작

《스톡홀름 신드롬에 관하여》, 《시비스킷에 관하여》, 《그들만의 이야기》, 《그 남자 그 여자의 착각》, 《늑대의 정령》,《푸른 수염의 아내》

출간 예정작

《스톰》- 늑대의 정령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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