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하는 것을 싫어하는 아내 장수정.

말을 하지 않고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고 살아서 그것이 버릇이 되고 습관이 되었다. 작은 일 하나하나에 상처를 받고 아파하면서도 풀 방법을 찾지 못하며, 혼자만의 세계에서 노느라 친한 친구 한명 없고, 남편에게 섭섭한 일이 있어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항상 마음속으로 만 남편에게 말하고 말이 입 밖으로 나오면 의지와 상관없는 말이 된다.

"당신 옆은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아요. 명랑한 여자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요."


활발하고 웃음이 많은 남편 최철우.

나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조용하고 차분한 은사의 딸인 장수정에게 마음이 끌려 데이트를 하고 결혼을 결심했다.
하지만 아내는 너무 말이 없고, 조용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 답답했다.
우리 집에서는 아내의 별명이 보살님, 비구니 스님이란다. 속을 알 수 없어 음침하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수정아, 우리 이야기하자. 대화를 해야 내가 무엇을 잘못 했는지. 당신의 불만이 뭔지 알지."


수정의 친정엄마, 철우의 은사이며 장모인 한재희 교수.

아무리 내 딸이지만 어떻게 내 뱃속에서 저런 애가 나왔는지 모르겠는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
정도 없고, 애교도 없고, 엄마를 귀찮아하는 딸을 섭섭해 하며, 밝고 명랑한 성격의 사위 철우에게 많은 정을 준다.
믿음직한 제자가 사위가 된 것이 자랑인 동시에 죄책감이 된다.

"도대체 뭐가 불만이니? 말을 해야 알지. 너 바보니? 최 서방 이해하게. 애가 부족해서 미안하네."

조용한 아내 수정의 아픔을 알아가고, 그 상처를 사랑으로 보듬는 듬직한 남편과 남편의 사랑을 고마워하는 아내.


조용한 사랑을 하는 조용한 부부의 이야기.



-본문 중에서-


뒷결에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아무리 사람들이 떠났다지만, 모두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며 어느 일요일 오전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집을 나왔다.
어쩌면 조금은 충동적이었다.
택시 기사에게 서울역에 가 달라고 했다. 이모와 이모부와 함께 뒷결을 떠나 서울에 올 때 기차를 타고 왔다는 것을 기억났다.
그러나 목적지인 서울역에는 왔지만 사람들에게 떠밀려 다니다가 길을 잃었다.
겁이 나고 당황스럽고, 난감해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손을 잡고 조금 한산한 곳으로 데려가 주었다.
“꼬마야 괜찮아?”
음료수를 건네며 나를 달래 주었다.
“이것 마셔.”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확인하니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오빠였다.
“꼬마야. 어디 가려고 혼자 나왔니?”
“뒷결.”
“뒷결? 뒷결이 뭐야?”
“……”
“꼬마야, 오빠가 집 찾아줄게. 오빠만 믿어. 그러려면 이름부터 알아야겠지?”
“……정.”
말하는 나도 잘 안 들릴 정도로 들릴 듯, 말 듯 작게 말하자 그는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꼬마야 말을 할 때는 듣는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크게 말해야 하는 거야. 음. 오빠 이름은 최철우라고 해. 나이는 열여섯 살이고 아버지는 대한 건설 사장님이야. 혼자 여행 가려고 나왔다가 꼬마를 만난 거야, 자! 오빠가 말 한 것처럼 너도 오빠에게 말해 줘야지? 뒷결이 어딘데 혼자 나왔어? 우선 이름부터 말해 봐.”
사투리를 쓴다고 놀림을 많이 받아서 말을 잘하지 않던 때였다. 하지만 이 친절한 오빠는 나를 이해해 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편해졌다.
“장수정. 열한 살.”
“장수정? 예쁜 이름이네? 뒷결은 어디야?”
“내가 살던 마을이에요.”
“네 이름처럼 마을 이름도 예쁘다. 어느 도에 있는데?”
“경상북도.”
“자! 경상북도에 있는 뒷결을 찾아볼까?”
그는 내 말투를 듣고도 웃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마음이 안정된 기분이 들었다.
배낭에서 지도를 꺼내 한참 동안 살피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정아, 경상북도에 뒷결이라는 마을은 없는데?”
“그럼 앞결은요?”
“앞결도 없어.”
마을 이름이 없다는 말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동네가 없어졌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아서 슬퍼졌다.
지금 생각하면 뒷결은 마을 사람들만 사용하는 명칭이기 때문에 지도에 당연히 안 나왔던 것이지만 그때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공사 때문에 마을 이름이 사라진 것으로 알았다.
“수정아. 앞결, 뒷결 말고 다른 이름은 없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이름도 앞결 초등학교였기에 그냥 앞결, 뒷결로 알고 컸고 따라서 정식 명칭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풀이 죽어 있는데 오빠가 말했다.
“너도 고향을 잃었니?”
그렇게 말하는 오빠의 표정이 쓸쓸했다.
“나도 얼마 전에 고향을 잃고, 애인도 떠나보낸 아저씨를 봤어. 그 사람의 애인 이름도 너처럼 수정이었거든?”
“그래요?”
“애인을 기다리며 고향을 떠나지 못 하는 그 사람을 보니 마음이 아프더라. 넌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해할 수 있어요.”
“내 마음 이해하는 아이는 네가 처음이야. 내가 이런 말 하면 그 사람이 바보 같다면서 이해하지 못 하는 친구 놈이 대부분이거든.”
오빠의 말을 들으며 동칠이 아저씨가 생각났다. 새끼 돼지가 태어나면 같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는데.
만약 뒷결을 떠났으면 어디 가서 살고 있을까?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오빠가 물었다.
“그런데 부모님은?”
“집에…….”
내 말에 오빠는 화들짝 놀랐다.
“그럼 너 혼자 고향 찾아가겠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열한 살짜리가?”
“예.”
“이런, 이런. 큰일 날 뻔했구나. 집은 어딘지 알아?”
“예.”
“가자. 오빠가 데려다 줄게.”
“하지만.”
“수정아. 뒷결은 너 혼자 찾아가기 힘든 곳일 거야. 네가 오빠보다 더 어른이 된 후에 찾아가도 늦지 않을 거야. 뒷결은 언제나 그곳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정말요?”
“그럼. 부모님 허락도 받지 않고 나왔다며?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고, 나중에 커면 당당하게 고향을 찾아가. 그래도 안 늦으니까.”
뒷결이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오빠의 말에 큰 용기를 얻었다. 나이를 먹어 내 힘으로 당당하게 뒷결에 갈 수 있는 날까지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오빠와 나는 내가 알려준 동네까지 버스를 타고 와서 집 앞까지 함께 왔다.
“여기가 네 집이니?”
“예.”
“그럼 오빠는 이만 가 볼게. 다음부터 위험하게 혼자 다니지 마.”
오빠는 손을 흔든 후 뛰어갔다.
집에 돌아왔으나 일요일 오전 잠깐의 외출을 신경 쓰는 가족은 없었다. 모두들 잠시 놀러갔다가 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도 그런 반응이 더 편했다.
그 후,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의 의식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뒷결의 그 꼬마아이로 남아 있었다. 너무 갑자기 그곳을 떠났기 때문에 변화에 적응을 할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뒷결에서는 사람을 사귀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었다. 이미 성격이 어떤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다 알고 있는 사이였고, 잘못한 일이 있어도 눈감아 주고 덮어 주었고 작은 마을에서 서로 의지하며 믿고 살았다.
하지만 도시는 달랐다.
사람을 만나고, 교제를 하고, 친해지려면 수없이 상대방의 마음을 시험해 보고, 이 사람이 나에게 필요한 사람인지 아닌지 머리를 굴려 계산하고,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고 비교를 당해야 했다.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해서 상대의 마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용하고, 진심으로 믿음을 주는 것이 어려워하고, 의지를 하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했고, 조그만 잘못을 해도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 크게 부풀려져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되기도 했다. 아무리 힘이 드는 일이 있어도 약한 사람을 보여 무시당할까 봐 속마음을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미 ‘정’이라는 단어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그렇게라도 어울려 어떻게든 살면 강해져서 처세술의 달인이 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몇 번 부딪힌 후 다치고 실패하면 마음을 닫고 사는 사람이 생긴다.
난 후자의 사람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나라님도 욕한다지만 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싫었다.
사람들과의 쓸데없는 소모전이 너무 힘이 들고 지쳐서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혼자 있는 쪽을 선택했다. 그 누구의 관심도, 간섭도, 호기심 어린 시선도 싫었다. 철저히 제3자로서 그들을 관찰하는 삶을 선택했다.
나에게 손을 내밀어 용기와 희망을 준 최철우 오빠를 다시 만날 때를 기다리며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 혼자 놀았다.
대학교에 입학한 후 뒷결을 찾아갔다.
그러나 밤낮이 따로 없이 흥청망청 돈을 써대는 관광지만 있을 뿐 뒷결은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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