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그동안 어디 있었어?”'“알아서 뭐 하게? 우린 벌써 오래전에 끝났잖아. 기억 안 나?”'“사랑이라 부르던 남자를 무참히 버렸던 여자답구나, 정은재. 여전히 뻔뻔하고 여전히 모질어.”'“그래, 난 뻔뻔하고 모진 여자야. 그러니까 모른 척 지나가.”'“너 같으면 모른 척 지나갈 수 있겠어?”'“왜? 손아귀에 움켜쥐고 마음껏 휘두르고 분이 풀릴 때까지 복수하고 싶니?”'“복수?”'분노에 가득 찬 표정에 이내 잔인한 미소가 덧그려졌다.'“그렇게 간단한 말로 표현해 버리다니…… 4년이면 참 오랜 시간인데 말이야. 그 오랜 시간 동안 내가 너를 두고 한 생각들이 참 우습게 느껴진다.”'“이미 끝난 여자를 붙들고 ‘그때’를 되짚는 것보다 우습진 않을 거야. 우리 오늘, 서로 못 본 걸로 하자. 나는 네가 나올 걸 알았다면 나가지 않았을 거고, 너도 내가 나올 줄 알았으면 걸음을 돌렸을 테니까.”'은재는 현보다 앞서갔다. 그가 어떻게 나올 줄 빤히 아는 것처럼 몇 걸음 앞서가 돌아서서는, 다가드는 그의 발길을 방해하듯 말을 막았다.'“그냥 레스토랑 로비에 내팽개쳐 두고 가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오늘 일은 고마웠어.”'“살아서 네게 고맙다는 말을 다 듣는구나.”'“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은재는 미안하다고 하지도 않았고, 변명도 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쭉 자신의 입장을 설명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럼에도 현은 화가 나지 않았다. 되레 고작 사과나 받자고 아픈 여자를 붙잡고 으르고 있나, 자신이 정말 한심하게 느껴졌다. 은재의 말마따나, 옛일을 끄집어내 잘잘못을 따지기엔 은재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위태로울 정도로 까칠하게 마른 상태이기도 했다.'아직도 고쳐지지 않았구나. 이 뻔뻔한 여자를 걱정하고 있으니…… 다른 남자가 생겼느냐고 묻고 싶으니…… 불치병이다, 한심한 놈.'현은 쓰디쓴 웃음을 깨물고 한숨을 내쉬었다. 레스토랑 로비에서 협박조로 뇌까리며 가녀린 팔을 붙잡아 막무가내로 끌고 나오지 않았다면 하고 벌써부터 후회하고 있던 자신이 짜증날 정도로 한심했다.'“이제 그만 가야겠어.”'은재는 삼분의 일쯤 남은 수액 주삿바늘을 조심스럽게 빼고 침대에서 내려왔다.'“밖에 차 대기시켜 놨어. 타고 가.”'“고맙지만 사양할래.”'은재는 현의 제안을 거절하고 그의 곁을 슥 스쳐 지나갔다. 혹시라도 현기증이라도 일으키면 부축해 주련만, 은재는 좀 전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사람 같지 않게 야무진 걸음으로 거실로 걸어 나갔다.'닫히는 문 사이로 은재의 서두는 몸짓이 사라진 후, 현은 은재가 누워 있던 침대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축 처진 몸으로 누워 있는 그녀의 이마를 쓰다듬고 볼을 만졌던 두 시간이 마치 꿈만 같았다. 그녀를 다시 만난 게 맞는지 확신할 수 없는 몽롱한 기분에 휩싸이고 말았다.'아직 멀었군. 한심하게도…….'보내고 싶지 않았다. 한순간이었지만, 이대로 붙잡아 가둘 수 있는 별의별 악랄한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은재는 물론 그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가 있는 곳만 알아내면…… 오늘은 그것으로 족했다.'창밖으로 빌라 현관을 나서는 은재가 보이자마자 현은 휴대폰을 꺼내 김 비서에게 전화했다.'-예, 실장님.'“지금 나간 정은재 씨 쫓아가 봐요. 어디 사는지 반드시 알아내야 합니다.”'촉촉한 은재의 눈동자와 마주칠 때마다 깨달았다. 그녀에 대한 사랑이 한 치도 줄지 않았음을. 아니, 외려 가슴속에 켜켜이 쌓인 그리움 때문에 더욱 애틋해져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