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향산 자락의 외진 산속. 그곳에는 주변 풍경과 어우러진 모습을 지닌 집 한 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아침에는 일찍 잠에서 깬 작은 겨울 산새들이 내려앉아 짹짹거리고, 밤에는 사방이 죽은 듯이 고요하여 가끔 멀리서 동면에 들지 못한 들짐승들의 울음소리만이 들려왔다. 달조차 함부로 내려앉지 못하는 평화로운 정경이었다.'그런데 그중 가장 큰 기와집에서 고요한 평화를 깨뜨리는 불안한 음성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마마, 석반이라도 좀 잡수시옵소서.”'이 상궁은 직접 수저를 들고 간절한 목소리로 청하였다. 벌써 닷새 째였다. 뭔가 먹을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억지로 먹이려 해도 금세 토해내는 탓에 화련의 얼굴은 예전의 모습을 잃고 잔뜩 수척해져 있었다. 허나 그보다 더욱 보기 힘든 것은 생명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공허한 눈동자였다. 예전의 총기로 반짝이던 맑은 눈망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시체와도 같은 표정으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화련은 얼핏 보면 산 사람이 아닌 박제처럼 보일 정도였다.'“마마! 정녕 이리 옥체를 상하실 생각이시옵니까! 마마께서 아직 춘추 어리시니, 옥체만 보중하신다면 아기씨야 금세 다시 들어서실 터인데, 어찌 그러시옵니까?”'이 상궁이 다그치듯 설득하려 했지만 화련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결국 이 상궁은 지친 표정으로 수저를 상에 내려놓았다.'“이젠 소인도 모르겠습니다. 마마께서 알아서 하옵소서.”'이 상궁은 이제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이 홱 돌아앉았다. 이 상궁의 눈동자에 순식간에 차오른 눈물이 넘쳐서 아래로 후드득 떨어졌다. 아릿한 감정으로 가슴속이 미어지다 못해 끝내 이렇게 눈물로 넘쳐흐르기를 매일 반복하니 평생 흘릴 눈물을 요 며칠 사이에 모조리 쏟아내는 것 같았다.'사실 화련이 이렇게 깨어난 것만 해도 무척 다행스런 일이었다. 분명 화련은 위중할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다행히 신기(神技)에 가까운 주강의 의술로 사흘 만에 의식을 차리게 되었다.'처음에는 화련이 모르게 하려 작정을 하였었다. 화련이 깨어나면 모두 이 일에 대해 함구하기로 입을 맞추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의식을 회복한 화련은 공허한 눈빛으로 옆에 있던 이 상궁에게 물었다. 아기씨는 가버리셨냐고. 이 상궁은 당황하여 아니라고 부정을 하였지만 화련은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본능이었을지도 몰랐다. 텅 빈 가슴속에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는 것은, 굳이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사실이었으니.'그 후로 화련은 살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아니, 실제로 그랬다. 마음뿐만 아니라 몸 자체에서 음식을 거부하니 이는 스스로 죽겠다고 작정을 한 것과 무엇이 다름이 있으랴. 게다가 밤에는 잠을 잘 생각도 안 하니 안 그래도 성치 않은 몸이 나날이 상하기만 하였다. 아무리 명의인 주강이 있다고 하더라도, 시침하고 뜸을 뜨는 것은 몸속의 기혈을 안정시키고 상처를 치유하는 것에 그칠 뿐,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으니 기력은 계속 쇠하여 가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러니 주변 사람들은 속이 타들어가고 문드러지고 있었다.'“마마, 소인이옵니다.”'문득 기척을 내고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비운이었다. 그 날 이후로 비운은 화련의 곁을 떠나지 않고 이렇게 지키고 있었다. 허나 화련은 그마저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지 비운이 있든 말든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황제의 곁을 지키고 있어야 할 중랑장이 여기 있는 것조차 전혀 궁금하지 않은 듯 이제껏 단 한 번도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래서 비운은 더욱 속이 탔다. 마치 아기씨가 유일한 희망이었다는 것처럼 그 후 완전히 망가져버린 듯 보이는 화련을 어찌해야 할지 하루 종일 그 생각뿐이 없었다.'“마마, 드셔야 하옵니다. 이 상궁의 말대로 기운을 차리셔야 다시 아기씨도 생산할 수 있는 게 아니겠사옵니까?”'화련은 살짝 고개를 돌려 비운을 쳐다봤다. 씁쓸한 표정. 마치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냐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혼이 나가버린 듯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비운은 가슴속이 하얗게 타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대공.”'비운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생명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잔뜩 갈라진 쉰 음성. 얼마 만에 들어 본 목소리던가. 겨우 이어진 생명줄을 붙잡듯이 비운은 화련의 말이 끊어질세라 황급히 대답하였다.'“예, 마마. 소인이 여기 있사옵니다. 무엇이든 말씀하소서.”'화련은 생명이 꺼진 공허한 눈빛으로 비운을 쳐다봤다. 비운은 가슴이 사정없이 옥죄임을 느꼈다. 한없이 맑던 저 눈동자에 다시 빛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기꺼이 이 두 눈이라도 모두 빼어 줄 터인데.'“아이를 배로 품는다는 것은 거짓인가 봅니다.”'“예?”'비운은 이해하지 못할 말을 내뱉는 화련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이럴 때는 무슨 대답을 하여야 하는가. 허나 화련은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계속 말을 이었다.'“내 태에 아이를 품었을 터인데, 어찌 뱃속이 아니고 가슴속이 이리도 텅 비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아니합니다. 여기 말이에요.”'화련은 자신의 왼쪽 가슴 위에 앙상한 손을 살며시 올려놓았다. 소리 없이 방울지더니 힘없이 떨어져 내리는 눈물. 비록 눈물을 흘린다고 하지만 그를 제외하면 화련의 표정은 방금 전과 다름이 없었다. 눈물은 투명하였지만 그 안에는 틀림없는 어린 혈이 담겨 함께 흘러내렸다.'비운은 그를 바라보며 자신이 대신 아파하기라도 하듯 얼굴을 찌푸렸다. 어느덧 목구멍이 가득 막혀 왔다. 단장(斷腸)의 고통과 슬픔을 자식 잃은 어미가 아니고서야 그 누가 온전히 이해할까. 끝내 비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결국 화련은 그날 밤 주강의 시침을 받아 억지로 잠에 들어야만 했다. 더 이상 잠마저 자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던 것이다.'“자고… 싶지 아니하여요.”'화련은 몰려오는 수마(睡魔)를 느끼고 열흘 만에 처음으로 감정을 내비쳤다. 그것은 공포였다.'“죽고 싶은 게더냐?”'“부디…….”'주강은 화련의 간절한 부탁을 무시하고 금침을 혈에 정확히 꽂아 완전히 잠들게 하였다. 눈을 감은 화련은 호흡조차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깊은 곳에 의식을 놓았다. 그 창백한 모습은 마치 시체와도 같았다.'잠시 후 한 사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주강은 자리에서 일어서 그 사내를 향해 읍을 하였다. 누구에게도 허리를 굽히지 않을 것 같은 주강이 머리를 조아리는 사내.'“나가보라.”'낮은 음성. 주강은 말없이 고개를 한 차례 숙이고 물러났다.'그 사내는 천천히 화련을 향해 걸어왔다. 창을 타고 들어온 달빛이 살며시 그 사내의 얼굴에 내려앉으니 마침내 그 모습이 드러났다. 바로 무원이었다. 마차로 사흘 거리인 황궁에 있어야 할 황제가 단향산 자락에 나타났다.'무원은 화련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은 얼핏 담담해 보였지만 입술은 악 다물린 채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살며시 화련의 얼굴로 뻗어나가는 무원의 손끝도 파들파들 떨렸다.'“연아.”'무원은 뜨거운 음성을 토해냈다. 가슴속에 담긴 뭔가가 계속 울컥울컥 올라오려는 것이 억지로 입을 다물지 않으면 그대로 쏟아내버릴 것만 같았다.'너무 야위었다. 보름 전에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어찌 이리 망가져버렸다는 말인가. 역시 보내는 게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궁에 잡아 두는 것이었는데. 한순간의 어리석은 선택이 되돌리지 못할 천화(天禍)를 불러올 줄이야.'무원은 조심스레 화련의 움푹 꺼진 볼을 만져 보았다. 비단처럼 보드랍던 살결도 푸석푸석해져 있었다. 무원은 끝내 참지 못하고 깊은 신음을 작게 흘리고 말았다. 가슴속이 쇳물처럼 녹아내렸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었다. 결국 쫓아내듯 보내 이리 만들었으니 모두 자신의 잘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