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각 무원은 건게전에서 한 사내를 만나고 있었다. 태양궁의 그 수많은 편전(便殿)들을 놓아두고 굳이 침소인 건게전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인지 다른 사람이 보기엔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환국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였다. 황제의 침소를 제외한 다른 모든 곳에는 태양궁에서조차 여러 눈과 귀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황제의 수족이 되어 궁궐의 살림을 도맡은 내시들도 이미 여러 세력에 연이 닿아 있어 뒤에 꼬리가 없는 자를 찾기가 힘들었고, 그것은 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무원이 알면서도 아직까지 그들을 내버려 두는 이유는 속이 검은 중신들에게 벌써부터 경계심을 심어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직까지는 그저 말 잘 듣는 허수아비처럼 보일 필요가 있었다. 사람은 방심할수록 허점을 잘 보이는 법이니까.'허나 무원은 이제는 더 이상 웅크려 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과 맞서기에는 아직 모자란 부분이 수없이 많았지만 문제는 백성들이었다. 그들을 구할 방도를 알면서도 자신의 백성들이 죽어가는 꼴을 보고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힘을 가져야만 하는 절실한 이유가 한 가지 더 생겨버렸다.'“폐하, 소신의 부족한 식견으로는 결국 한양(寒陽) 지방에서부터 공사를 시행하여야 함이 마땅한 줄로 아뢰옵나이다.”'그 사내의 말에 무원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한양 지방은 지금 가뭄의 피해가 가장 극심한 곳이었다. 사실 그곳은 원래 그리 풍족한 지방이 아니었다. 겨울이 무척 혹독하여 이모작조차 불가한 데다, 봄과 여름도 그리 기후가 좋지 않아 비가 많이 내려도 작물이 잘 자라지 않았다. 헌데 이번에 가뭄까지 겹쳐 백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먹을 게 없는 상황이라 굶어 죽든가, 아니면 살기 위해 한양을 떠나고 있어 아예 마을 자체가 없어진 곳도 여러 군데였다. 당장 그곳에 관개 시설을 놓는다면 내년부터는 효과를 볼 것이 틀림없었다.'다만 문제가 있다면 대신들이 그에 대해 반대하고 나설 게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른 중대한 명분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단 한 가지 이유, 자신들에게 돌아올 이득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대규모 국책 사업을 벌이려면 백성들에게 거둬들이는 세금과 황실의 재산만으로는 어림도 없었기에 응당 관리들도 많은 부분을 충당해야 했는데, 그런 척박한 지방에 쏟아 부어 봤자 딱히 그들에게 돌아오는 이익은 전혀 없었다. 힘 있는 가문들은 대부분 북양 지방이나 진양 지방처럼 비옥한 땅을 소유하고 있었으니 마땅히 그곳부터 손을 대야 한다고 말 같지도 않은 근거를 대 가며 역설을 할 것이었다. 그들에게 백성들의 고통은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너도 알 것이다. 대신들의 동의 없이는 불가하다.”'황제의 말에 앞에 앉아 있던 사내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폐하, 굳이 저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사옵니다.”'그 말에 무원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무원은 더 말해 보라는 듯 가만히 경청하였다.'“폐하께서 필요하신 것은 다른 곳에서 찾고, 차라리 저들을 이용하심이 더 나을 줄로 사료되옵니다.”'“저들을 이용한다.”'무원은 그 말을 곱씹다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들을 이용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으리라. 어차피 그들의 도움을 받으려면 자신이 한 차례 고개를 수그리고 들어가야만 했는데 그것은 결과적으로 대신들에게 더 큰 힘을 실어 주게 될 것이었다. 그것은 황실의 권위와 자존심에 관한 문제를 넘어 장기적으로 더욱 상황을 힘들게 만들 수도 있었다.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잡는 것. 그 사내를 바라보는 무원의 눈빛이 무겁게 내려앉았다.'“구체적으로 말해 보라.”'무원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가지 명안이 있었지만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사내에게 물었다. 그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 황제의 명을 받들어 자신의 머릿속에 담긴 것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사내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무원의 얼굴에 맺힌 차가운 미소가 짙어졌다. 그 사내가 말한 것도 자신의 생각과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혹 네게 계속 짐의 곁에 남아 있으라 한다면 어찌할 터냐.”'“소인은 천인이옵니다. 관직도 없이 어찌 폐하를 모실 수가 있겠나이까.”'환국에서 천인은 대문과(大文科, 문관 시험)와 대무과(大武科, 무관 시험)를 볼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대인명부(大人名簿, 귀족 명단)에 등재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국법에는 분명 상민들도 과거 시험을 볼 수 있다고 명시돼 있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구 할(90%) 이상이 농민인 백성들이 그 어려운 과거 공부를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였다. 그저 아이들을 동원하여 밭일을 해서 하루하루 연명해 나가는 것이 유일한 관심사일 따름이었다. 허나 천민들은 그나마 그 허울뿐인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짐이 네게 성(姓)을 하사하겠다. 대문과를 보라.”'황제가 성을 하사한다는 것은 정식으로 관청에 이름이 등재되며 결과적으로 면천(免賤)을 의미하였다. 천인으로서는 이제껏 유례가 없는 크나큰 성은이었지만 어찌 된 것인지 그 사내의 안색은 그다지 좋지가 않았다.'“가문을 버리라는 의미가 아니다.”'무원의 말에 그 사내의 눈이 크게 뜨이었다.'“섬이 가라앉으면 배라도 있어야 익사를 면하지 아니하겠느냐. 그 섬이 다시 떠오를 때까진 그 배로, 목숨을 연명하거라. 짐이 그 섬을 돌려줄 것을 이미 네 누이에게 약조하였으니.”'“폐하!”'그 사내는 즉시 자리에 내려와 바닥에 엎드려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제야 황제의 하해와도 같은 성은이 가슴에 밀어닥치는 것인지 사내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폐하, 미천한 소인, 금일 성상(聖上)의 해해와도 같은 성은을 입으매, 폐하의 명을 받들어 이 목숨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그날까지 신명(身命)을 다 바치겠나이다.”'그리 말하며 이마를 돌바닥에 힘껏 찍는 그 사내의 이름은 바로 성조산. 바로 화련의 오라버니였다. 어제 무원은 화향루(花香樓)에서 잠깐 조산의 식견을 듣고 범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하고 오늘 다시 이렇게 직접 몰래 궁으로 들였던 것이다.'과연 영민한 화련의 친오라비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산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여러 생각들은 놀랍고 기발한 것들이 많았고, 그것은 순식간에 무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무원은 한눈에 눈앞의 사내가 자신에게 있어 지금 가장 필요한 자라는 것을 깨닫고 이렇게 자신의 곁에 두려 하였던 것이다.''화련은 지금 고민 중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요란하게 고민을 하고 있었다. 자리에 일어섰다가 도로 앉고, 방을 나섰다가 되돌아오는 짓을 계속 반복하니 뒤를 따르는 나인들도 함께 갈팡질팡 이리저리 갈피를 못 잡았다. 보다 못한 이 상궁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화련은 그저 한숨만 푹 내쉬며 자신의 손에 들린 긴 막대를 만지작거렸다. 그 막대는 바로 대금이었다. 해시(저녁 9시)가 가까워 오자 월하정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었음이다. 이제 엄연히 황제의 후궁이나 마찬가지이니 야밤에 직접 황제를 찾아 나서는 모습은 무척 삼가야 하는 일이었기에 화련은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황제의 행차를 기다림이 가장 법도에 맞는 일이긴 하였지만 화련은 그리 핑계를 대서라도 무원을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