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이 흐드러지게 마당에 내리쬐고 있으니 어느덧 팔월도 반이나 지났다. 화련(話蓮)은 이렇게 더운 날은 도무지 힘을 못 쓰겠다고 생각하며 그늘이 내린 마루에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혹여 천하가 모두 불가마로 변한 건 아닌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더운 날이었다. 9세 어린 소녀의 축 늘어진 자그마한 몸을 움직이게 만든 건 마당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한 사내의 중후한 목소리였다.'“연아야.”'아버지의 목소리다. 머릿속이 멍멍했지만 화련은 다행히 제대로 알아듣고 몸을 일으켰다.'“예, 아버지.”'땀으로 온몸이 축축해서 무명옷과 살갗이 찰싹 붙어 서로 구분이 가질 않았다. 그런 화련의 모습을 본 성학주(成學宙)는 낮게 한숨을 내쉬더니 혀를 끌끌 찼다. 보아하니 동무들과 어울려 또 한바탕 놀다 온 게 분명했다. 제 어미를 닮아 여름 뙤약볕에도 잘 타지 않는 하얀 피부가 벌겋게 익은 것이, 오늘 밤에는 또 얼굴이 따갑다며 훌쩍이는 소리를 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또 어디서 그리 뛰다 온 게냐?”'“그, 그것이…….”'여름에는 무리해서 놀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을 또 거역했다는 생각에 화련은 말꼬리를 흐리며 안색을 붉혔다.'“되었다. 여름에는 힘없다고 허구한 날 죽는 소리 하더니만, 여름 뙤약볕에 그리 뛰어다니니 힘이 남아날 턱이 있더냐. 어서 가서 네 오라비나 불러 오거라.”'“예, 아버지.”'화련은 풀이 죽은 얼굴로 오라버니인 성조산(成照山)의 방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학주는 그런 딸의 모습을 보며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막내딸을 보고 있노라면 항상 죽은 자신의 부인이 떠올랐다. 이제 겨우 아홉 살임에도 어찌나 제 어미를 똑 닮았는지 가끔씩 놀랄 때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세 자식 중 화련이 가장 특별하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한편 화련은 앞으로는 아버지 말씀대로 자중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오라비의 방으로 걸어갔다. 그 앞에 당도하니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문살이 많이 해지다 못해 조각조각 부서지기 시작하는 낡은 방문. 그것만으로 이 집안의 살림이 짐작되었다.'“오라버니, 계세요?”'화련이 조심스레 불렀으나 안에선 대답이 없었다. 화련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마루 위로 올라가 살며시 문을 열었다. 그 안에선 호리호리한 청년이 예상대로 서책에 코를 박은 채로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아예 그 안으로 들어가 옆에 앉아서 책을 대놓고 훔쳐보는데도 전혀 알아채지 못하니, 결국 화련은 작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제야 조산은 누군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화들짝 놀래어 몸을 일으키다가 상에 무릎을 찧고 말았다.'“윽, 연아야!”'“어마, 오라버니. 괜찮으셔요?”'무릎을 감싸고 앉아 끙끙거리는 모습을 보니 괜히 장난을 했나 하는 생각에 미안함이 들었다. 조산은 애써 고통을 참으며 웃어 보였으나 입가가 일그러지는 것이 여전히 아픈 것임에 틀림없었다.'“미안해요, 오라버니. 저는 아무리 불러도 오라버니가 대답이 없어서.”'“아니다. 네 대답을 못 들은 내가 잘못이지. 그나저나 어인 일이냐? 설마 그새 내가 정해준 분량을 모두 본 게냐?”'조산의 물음에 그제야 화련은 생각났다는 듯이 작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리고 생긋 미소를 지으며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설마요, 오라버니. 제가 아무리 똑똑하더라도 <中庸(중용)>을 어찌 그리 쉽게 읽겠어요. 아직 읽어도 뭐가 뭔지 전혀 모르겠어요. 나중에 좀 도와주셔요. 그보다 제가 이리 온 건 아버지께서 오라버니를 부르셔서 그런 것이니 서둘러 가 보세요.”'“<大學(대학)>을 여덟 살에 모두 강독했던 네가 그런 엄살을 피우는 것이냐. 하여튼 아버님께서 부르신다니 얼른 가 보아야겠구나.”'조산은 화련을 뒤에 남겨두고 나가려다가 멈칫하고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아버님께는 들키지 않게 항상 조심하고.”'“예, 오라버니.”'꽃이 피어나는 듯한 동생의 화사한 미소에 결국 조산도 표정을 풀고 웃으면서 밖을 나섰다.'오라비가 떠나고 난 뒤 화련은 뒤따라 나서려다가 문득 조산이 보던 책에 시선이 갔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결코 참지 못하는 아홉 살 소녀, 결국 마음을 굳혔는지 다시 자리에 앉아 그 책을 조심스레 넘겨 보았다. 얼마나 읽었는지 너덜너덜한 서책의 겉면에는 멋들어진 필체로 <周易(주역)>이라 쓰여 있었다.'“역…, 역경이잖아.”'오경(五經) 중 하나인 <易經(역경)>. 사서(四書)를 끝내기 전엔 보여주지 않겠다고 했기에 그저 침만 삼켜야 했던 그 책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첫 장부터 넘겨 보았다. 허나 그 조심스런 도둑 독서는 얄궂게도 다시 벌컥 열리는 문소리와 함께 멎어야만 했다.'“내 이럴 줄 알았다.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어물전에 놔두고 나가려 한 내 잘못이지. 뛰지도 못하는 것이 나는 법을 읽어서 무얼 하겠느냐. 가서 중용이나 마저 읽거라.”'조산은 그리 말하며 화련의 손에서 역경을 뺏어 들었다. 화련은 정말 생선을 빼앗긴 새끼 고양이처럼 허망한 표정으로 그 서책을 바라보았고, 그 모습이 귀여운지 조산은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有弗學이언정 學之이면 弗能이거든 弗措也이라.’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화련은 무슨 의미로 오라비가 그런 걸 묻는지 잠시 조산의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대답하였다.'“배우지 아니함이 있을지언정 그것을 일단 배우면 능해지지 않을 때까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그래, 맞았다. 중용의 이십 장에 나오는 말이지. 벌써 거기까지 읽다니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구나. 그렇다면 이것의 진의(眞意)가 무엇인지 알겠느냐?”'화련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그 말에 별다른 뜻이 있을지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대체 무슨 뜻으로 그리 묻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모르겠습니다. 무슨 뜻이온지요?”'“한 번 잡은 서책은 그에 완전히 익숙해질 때까지 다른 곳에 시선을 돌려선 안 된다는 뜻이다. 가서 중용을 완전히 터득하고 오거라. 그 다음 것은 그 다음에 배워야 함이 마땅하다.”'화련은 도무지 아쉬움이 가시지 않았지만 오라버니의 명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중용의 다음 구절이 있었으니, 물러서더라도 마지막 반항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새침하게 입을 열었다.'“허나 공자께선 ‘有弗思이언정 思之이면 弗得이거든 弗措也라.’고 하셨습니다. 어찌 한번 마음에 품은 것을 쉬이 놓아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 또한 공자의 가르침과 반하는 것입니다.”'“뭐라?”'아홉 살 먹은 꼬마애가 또랑또랑한 발음으로 그리 대꾸를 하니 조산은 잠시 머리로 가는 기가 멎은 느낌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동생은 선재(仙才) 중에서도 하늘이 내리신 천재(天才)니라. 과유불급이라 하였던가, 이렇게 천인으로서 썩기엔, 그리고 계집으로 태어나 한 줌의 뜻조차 펴지 못하고 먼지로 사그라지기엔 너무 아까웠다. 얼굴의 상도 천하기는커녕 천기를 타고난 듯이 고귀함이 흐르고, 그 미태 또한 어린 나이에도 벌써 꽃봉오리가 오르는 것을 숨기지 못하려 할 정도거늘, 운명이란 게 있다면 참 얄궂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 맹랑한 녀석. 말은 참 잘하는구나. 네 말도 일리가 있다. 허나 만물에는 무엇이든 순서가 있는 법이다. 그게 천하가 움직이는 법도이니 이제 그만 미련을 버리거라.”'“예, 오라버니.”'화련은 여전히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더 이상 반항하지는 않았다. 무려 열셋이라는 나이 차 때문이라도 화련은 오라비에게 언제나 아버지에게만큼 깍듯하게 대하였다.'오라비를 따라 밖을 나서려는데 이번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스무 살 정도 돼 보이는 처녀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선녀처럼 고운 미인이었다. 비단같이 고운 머리카락을 곱게 땋고, 맑고 새하얀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졌으며, 굳게 다물린 입과 차분한 눈빛에서는 마치 사대부의 규수처럼 도도한 기품이 느껴졌다. 다만 그에 어울리지 않게 색 바랜 의복은 여러 군데를 기워 입어 기묘하게까지 보였다.'“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