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걸려 온 전화가 세호의 죽음을 알렸다. 현준이 일본에 있을 때였다. 세호의 차가 다른 차와 충돌을 해 그가 사고로 죽었다는 예림의 전화였다. '― 교통사고야, 오빠.'예림은 우는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이런 일을 당하니 오빠밖에 생각이 나지 않아. 무서워 죽겠어, 현준 오빠.'세호의 죽음은 망치로 머리를 치는 것처럼 강한 충격을 현준에게 주었다. '“어쩌다가…… 그래, 여사님은 어쩌고 계셔?”'― 엄마는 오빠의 사고 후 쓰러졌다가 깨어나시곤 시간만 나면 통곡을 해. 이러다 큰일 날 것 같아.'“곧 갈게. 어머니를 잘 위로해 드려. 너도 놀랐겠지만 우선은 너라도 기운차려서 어머님 잘 보살펴 드려야지.”'― 응, 오빠. 빨리 와 줘. 정말 무서워.'전화를 끊은 현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죽었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늘 자신감에 넘쳤던 세호였다. 모든 게 만만해서 세상을 얕잡아 보던 그도 사고 앞에선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이렇게 쉽게 죽어 버리다니. '권세호가 죽었다.'호텔을 나와 공항으로 가는데도 여전히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권세호가…… 죽었다!''현준이 장례식장에 도착한 시간은 자정이 넘어서였다. 효정은 정말이지 처참할 정도로 슬퍼하고 있었다. 퉁퉁 부운 눈으로 효정이 현준을 보더니 아이고 소리를 내며 그를 끌어안았다.'“어쩌면 좋아. 어쩌면 좋아. 내 아들이 죽었다네. 내 아들이.”'탕탕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효정이 울었다. 효정의 주먹은 아플 정도로 강했다.'“진정하십시오.”'“내가 이제 어떻게 살아? 응? 우리 아들이 죽었는데 내가 어찌 살아.”'“엄마, 그만 해. 이러다가 또 쓰러진단 말이야.”'예림이 효정을 달래는 사이 현준은 향을 사르고 영정에 절을 했다. 영정사진 속의 세호가 비웃는 눈초리로 현준을 바라보았다. '세호는 현준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도 세호는 현준이 살아서 그의 영정에 절을 하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할 것이다. 그랬던 세호이니만큼 저렇게 사진에 검은 띠를 두르고 그를 맞이한다는 것에 죽어서도 분통을 터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난 네놈이 싫단 말이야.”'세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세호는 현준에게 그런 모욕을 다반사로 주었다. 그는 현준이 효정의 비위를 맞추며 돈을 뜯어 간다고 생각했다. 특히 장학 사업이나 자선사업을 널리 펼치는 효정과 달리 그녀의 덕을 보는 수혜자들을 가난뱅이 근성을 지닌 것들이라 경멸하면서 그 속에 현준을 끼워 넣었다. '효정은 현준을 교회 목사에게 소개받은 뒤 이상하게 옆에 두고 싶다는 끌림을 느꼈다. 굳이 예림의 과외선생이라는 명목으로 현준을 곁에 둔 것이 세호의 비위를 거스를 정도로. '사실 현준은 예림의 과외를 가르치지 않아도 됐다. 그는 세호가 생각하는 만큼 곤궁한 형편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도 현준이 예림의 과외선생 노릇을 계속한 것은 그 역시도 예림이나 효정에게 이끌렸기 때문이었다.'세호와 달리 너무도 친절하고 자상했던 효정과 예림이 그의 죽음을 맞고는 현준에게 의지한다는 것 역시 세호에겐 빈정 상하는 일일 것이다. '언젠가부터 현준도 ‘너만 날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너를 싫어한다’는 것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기에 세호와 그의 사이는 험악하기까지 했다. 현준은 그것이 조금 후회가 됐다. 이렇게 죽을 줄 알았다면 세호가 어떻게 나오던 그에게 잘해 주었을 것이다.'“일본에 갔다더니 소식 듣고 달려온 모양이지? 정말 고맙네.”'“그런데 어쩌다가 사고를 당했습니까?”'“새벽에 집에 오는 도중 그 애의 차가 버스와 충돌했다네.”'“새벽에요?”'“새벽에 집으로 급히 돌아오다 사고를 당한 것 같아. 그 새벽에 어딜 갔다 온 건지, 원. 며늘아기에게도 아무 말이 없었는지 도통 말이 없어.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않고 있는 것이 넋이 좀 나간 것처럼 보여…….”'효정이 두리번거리다가 숙현이 보이지 않자 예림을 바라보았다.'“인사를…… 아니, 얘가 어딜 갔나? 예림아, 네 새언니는 어디 있니?”'“쓰러질 것처럼 보여 억지로 숙소에 눕혀 놓고 나왔어.”'이 장례식장은 상주들이 쉴 수 있게 독립된 방이 딸려 있었다. 몰아치는 조문객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그들을 맞이하는 것만으로도 큰일이었다. 비록 말 한마디 않고 멍하니 앉아서 오가는 조문객의 인사까지 무시하고 앉아 있긴 했지만, 효정에겐 그러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무너져 내릴 것처럼 안타까워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 짠해 예림은 억지로 숙현을 끌어다 이곳에 딸려 있는 숙소의 침대에 눕혀 놓았다. '“잘했구나. 근데 숙현이에게 뭐 좀 먹였니? 도통 먹지를 않고 있던데.”'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있는 것이나 반쯤 넋이 나간 것은 효정이나 숙현이나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효정은 나이가 있는지라 실성할 때까지 울기는 했지만,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너라도 숙현이 좀 챙겨 먹여. 친구 좋은 게 뭐야? 아, 참. 자넨 세호 처 아직 못 봤지?”'현준이 처음 사업을 시작하고 중국에서 동분서주하고 있던 6개월 동안 세호는 예림의 친구와 결혼을 했다. 예림이 중국으로 세호의 결혼 소식을 알려 주었으나 굳이 결혼식을 보기 위해 귀국하고 싶지 않아 참석하지 못했다. 그래서 세호가 예림의 친구와 결혼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세호의 부인과 만난 적이 없던 현준이었다. '“일단 재웠으니까 깨어나면 먹일 게. 숙현이 걱정은 말아요.”'예림이 일어나더니 곧이어 전복죽을 가져왔다. '“자, 엄마나 이것 좀 드시고 눈 좀 붙여요. 이 밤에 올 사람도 없을 테니까.”'“그러세요, 여사님. 조금이라도 드십시오.”'현준이 수저를 들어 효정의 손에 쥐어 주었다. '“내가…….”'주르륵 효정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아들이 죽었는데 이런 걸 먹어야 한단 말이니?”'“엄마는…….”'효정과 예림이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갑자기 들이닥친 조문객으로 인해 효정은 죽사발을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이 든 남자가 향을 사르고 효정에게 허리를 굽혔다.'“아이고 박 여사님, 이런 변을 당하시다니……. 소식 듣고 놀라 달려왔습니다.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원.”'“아이고 강 사장님…….”'새 조문객에 밀려 현준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복도는 물론 현관까지 가득 들어찬 꽃다발과 사람들로 북적이는 건물을 빠져나오니 대낮처럼 밝은 건물 안과 달리 바깥은 몇 개의 가로등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주 캄캄했다. 대학병원에 딸린 장례식장이라 그런지 건물을 둘러싼 녹지가 제법 울창해 장례식장만 아니면 공원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현준은 외등이 처량하게 빛나고 있는 밤의 숲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어둠 속에서 만개한 벚꽃 나무가 작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벌써 봄인가?'나무를 올려다보던 현준은 벚나무 아래에 기대앉아 있는 그림자를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기척에 어둠과 융합해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어둠처럼 검은색 면 티셔츠와 스키니진을 입은,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 같이 말라 보이는 여자였다. '만개한 몇 개의 꽃잎이 눈처럼 여자의 얼굴에 팔랑 떨어져 내렸다. '“…….”'현준을 보는 여자의 눈이 점점 커졌다. 어둠에 익숙해진 현준에게 여자의 눈에 물기가 배어드는 것이 보였다. '그림자가 졌지만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반짝이는 눈동자의 색은 완벽하게 검고, 깊고, 슬퍼 보인다는 것을. 그리고 가슴 아픈 검은색이라는 것도.'“세호……!”'여자의 낮은 중얼거림에 현준은 잠시 주춤했다. 세호와 관계있는 여자 같았다. 현준은 여자의 얼굴에 나타난 찰나의 경악에 이어 재빨리 얼굴을 덮은 분노를 읽었다. '“권세호, 맞아? 죽지 않았어? 내 저주가 듣지 않았어?”'저주? 무슨 소리일까? 여자의 혼잣말이 현준의 궁금증을 자아냈다.'“나쁜 놈.”'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은 여자의 눈에서 느껴지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거센 불길이었다. '나를 향한 욕인가, 아니면 세호를 향한 욕인가? 잠시 현준은 반응하지 않았다. '“왜 죽지도 않아?”'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여자는 자신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여자가 발밑에 있는 소주병을 집어 들었다. 그제야 현준은 여자의 발음이 약간 불분명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닫자 이제야 느껴지는 주향, 여자는 술에 취해 있었다. 그것도 만취한 상태로 보였다. 이윽고 여자는 병뚜껑을 따더니 냉수를 마시듯 술을 들이켰고, 그것을 보고 현준은 손을 내밀어 술병을 잡아챘다. 주량을 넘기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죽고 싶어?”'현준의 말에 여자가 픽 웃었다.'“그래, 너 같은 놈이랑 같은 세상에 살기 싫어. 네가 죽었다면 살고 네가 살았다면 죽겠어. 너랑 같은 하늘 아래서 결코 살지 않을 거야. 넌, 살았지? 그럼 난 죽을래. 자, 그러니 흙을 덮어.”'여자가 그대로 누워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