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은 손에 들고 있는 펜을 내려놓고 펼쳐져 있는 책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한 시간 가까이 같은 페이지를 머물고 있었다는 걸 깨닫자 그제야 책을 조용히 덮었다. 이렇게 집중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시간을 보낼 걸 예상했었다면 그냥 집에서 모자란 잠이나 잘 걸 그랬다. 절로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 수진은 현재 임용고시 2차 시험 후 합격여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 세 번째 도전으로 또 떨어진다면 제 길이 아니라고 여기고 다른 직업을 찾아 볼 생각이었다. 언제까지나 부모님께 기대어 무위도식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생각만으로도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듯싶었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내일 훈련소에 입소하는 남동생 현수와 같이 저녁을 먹을 수 있게 집에 일찍 들어오라는 엄마로부터의 문자를 무시하고 있는 터였다. 친구들과 어울리기 바빠 3일 내내 들어오지 않고 있는데 부모님은 제대로 싫은 소리도 하지 못하고 ‘입대를 바로 앞두고 그 애 마음이 얼마나 심란하겠니.’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현수에게는 부모님의 말과는 달리 친구들과 헤어지는 건 심란하고 가족과 헤어지는 건 그다지 심란한 일이 아닌 듯한 게 확실한 듯 이번 3일 연속 외박을 하고도 영장 받은 후 학교를 휴학하고는 거의 집에 붙어 있는 적이 없었다. 오늘도 엄마는 분명 하루 종일 현수가 좋아하는 음식을 잔뜩 해놓고도 당사자에게는 들어오라는 재촉 전화도 제대로 했을 리가 만무했다. ' 수진은 책상 위에 널려 있는 책들을 낡은 가방에 담고는 의자에 걸어 놓았던 패딩점퍼와 머플러를 하고 도서관 열람실을 나왔다. 아침에 도서관에 올 때부터 잔뜩 흐리다 생각했는데 밖으로 나오자 가는 빗줄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우산이 없는 터라 비를 맞아야 했다는 생각이 들자 열람실의 좌석 표를 섣부르게 반납해 버린 걸 후회하며 패딩점퍼의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집으로 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15분 쯤 걸어 수진은 아파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벨을 누르는 대신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간 수진은 현관 앞에서 젖은 패딩점퍼를 벗어 탁탁 소리를 내며 털고는 기름 냄새가 진동하고 있는 주방을 향해 말했다. '“엄마, 저 왔어요.”'“문자를 그렇게 보냈는데 답장은 안 하고, 왔다고 했으면 엄마가 우산 가지고 가잖아.”' 밀가루가 잔뜩 묻어 있는 앞치마를 두른 은영이 주방에서 얼른 뛰어 나오며 말했다. 문자를 자꾸 보냈던 이유가 일찍 들어오라는 것 외에도 우산을 가지고 가지 않은 수진에 대한 걱정도 포함되었는가 보다. 수진은 은영에게 소리 없이 크게 웃어 보이며 낡은 스니커즈를 벗고 들어섰다. 은영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는 수진의 볼을 두 손으로 감싸 주며 말했다.'“춥다. 얼른 옷 갈아입어. 저녁 먹자.”'“현수 왔어요?”'“응!”' 은영이 바삐 대답하고는 가스불이 켜져 있는 게 걱정스러운지 다시 주방으로 총총히 걸어갔다. 은영이 감싸 쥐었던 볼을 멋쩍은 듯 두 손으로 다시 매만져 보았다. 한 달만 있으면 25살이 되는데도 제 밥벌이도 못하는 딸을 걱정하는 손길에 할 말을 잃고 만다. 걱정보다는 질타를 해주어야 더 맞을 듯싶은데 괜한 자격지심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터덜터덜 느리게 걸어 방문을 열었다. 5시가 넘었을 뿐인데 비가 와서인지 어두운 방 한구석에 수진이 가방과 패딩을 내려놓기 무섭게 “누나!” 하고 부르는 현수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진이 놀라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악, 깜짝 놀랐잖아. 뭐하는 짓이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것을 뒤로 미루고 서둘러 불을 켜자 방한가운데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현수가 벌떡 일어나 방문을 잠그고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책상을 짚고 서 있는 수진 앞에 다가와 다시 문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누나. 나 살려줘.”'“뭘? 내가 널 왜 살려?”'“누나.”'“뭐야? 너 내일 입대하는 놈이 무슨 사고라도 친 거야?”' 수진이 딱 정곡을 찌른 듯 현수의 고개가 푹하고 아래로 떨어뜨리어졌다. 190센티미터가 다 되는 덩치가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는 모습에 일이 생긴 게 맞구나 싶어 철렁하며 가슴이 내려앉는 듯했다. 부모님이 아닌 저에게 살려 달라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수진은 책상 안쪽에 넣어진 의자를 빼내어 후들거리는 몸을 앉히고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무슨 일인지 말해.”' 현수가 큰 덩치를 더욱 작게 말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1200만원이 필요해.”' 현수의 입에서 나온 상상도 못할 큰 금액에 놀라 입이 저절로 벌어졌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놀란 눈으로 그런 액수를 말하고 있는 현수의 정수리만 쳐다볼 뿐이었다. ''***' 현수에 의해서 잡힌 약속 시각은 6시였다. 하지만 걱정 때문에 수진은 약속시각보다 한 시간이나 이른 5시에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약속 장소인 카페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편의점에서 캔 커피를 뽑아 들고는 주변을 서성거렸다. 수진에게 무거운 짐을 다 떠넘기고 나라의 품으로 도망쳐 버린 현수를 대신해 이곳에 오기는 했지만 도저히 들어가 상대를 만날 자신이 생기질 않았다. 사실 돈 문제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 친구 차를 몰고 가다 외제차를 제대로 박아 버렸다는 현수의 말은 아직도 믿기 어려웠다. 차키를 아무렇지도 않게 남에게 넘기는 친구나 운전을 하겠다고 설레발을 친 현수나 다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다들 술을 마신 상태라 보험 회사도 부르지 못하고 낑낑대며 처리한데다가 다행히 다친 사람도 없었고 상대 운전자가 같은 학부의 1년 선배여서 사정을 봐주기로 하고 차 수리비가 나온 견적서를 오늘 만나 받기로 되어 있었다. 차가 어떤 식으로 사고가 났기에 그런 터무니없는 액수가 나올 수 있는지는 수진으로서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입대를 앞두고 부모님께는 절대 말하지 말라고 울면서 현수가 부탁했지만 수진이라고 그 큰 액수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허울 좋게 학생이라는 타이틀로 부모님께 여전히 용돈을 받아 쓰는 처지인데다가 통장 잔고에 십만 원 이상이 있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카드도 없으니 어디 가서 카드 론을 할 수도 없고 친구들에게 돈을 꿀만큼 비위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오늘 약속 장소에 나올 현수의 선배가 사정을 이해하고 차수리비를 갚기 위한 유예기간을 주기만을 간절히 기도할 뿐이었다. 정말 나오느니 한숨이라는 어른들의 말이 딱 떨어지고 있다. ' 수진은 비어 버린 캔을 쓰레기통에 넣고는 휴대폰 액정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5분 전, 슬슬 약속 장소로 들어가 앉아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커피 냄새가 가득한 카페 안을 두리번거리며 혼자 앉아 있는 남자를 눈으로 찾다가 없는 것을 확인한 수진은 문가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약속 시간까지는 2분이 채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오지 않는 것을 보면 시간에 대한 개념이 남다른 사람인 듯싶었다. 늦어도 상관없다는 주의이거나 딱 맞춰왔다거나……, 아니면 아쉬울 것이 없는 쪽이라 아주 늦게 올 수도 있을 거라는 예상이 들었다. 근 1년 가까이 도서관과 자판기커피에 익숙해져서인지 캐럴이 흘러나오는 카페 안은 낯설기만 했다. 커피 말고도 수십 가지의 메뉴가 적혀 있는 메뉴판을 뒤적거리고 있을 때 테이블을 톡톡하고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와 옆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잔뜩 긴장한 채로 시야에 보이는 길고 하얀 손가락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옮겨갔다. 브라운색의 짧은 무스탕을 입고 있는 키 큰 남자가 테이블 옆에 서서 수진을 내려다보더니 확인을 하려는 듯 물어왔다.'“생명과학부 민현수, 대신 나오신 분 맞습니까?”'“네. 맞아요. 현수의 누나입니다.”' 낮고 무뚝뚝한 목소리로 현수의 이름을 말하자 수진은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그녀를 스윽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손에 들린 봉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견적서입니다. 보시죠.”'“네.”' 수진은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잔뜩 주눅이 들은 채로 봉투를 열어 견적서를 꺼내어 보았다. 현수가 말했던 금액에서 뒷자리만 다른 숫자 조합을 쳐다보자 저절로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수진은 다리에서 저절로 힘이 풀려나가는 걸 느끼며 소파 끝자락에 엉덩이만 걸친 채 앉아 남자의 기색을 살폈다.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고 앉은 남자는 새카만 머리카락이 눈을 거의 가리고 있다시피 해서 기색을 알기가 어려웠다. 다만 여유로운 태도에서 수진이 용건을 꺼낼 때까지 기다려 줄 듯한 느낌은 받을 수 있었다. 상황에 상관없이 제 할 일을 하는 카페의 종업원에게 커피 두 잔을 주문한 후에 수진은 무겁게 가라앉은 마음을 추스르며 아까부터 생각해왔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내었다.'“현수가 입대를 했어요. 부모님께 죽어도 비밀로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나오기는 했지만 저는 이걸 변제할 능력이 되질 않습니다.”' 말을 하는 수진이 느끼기에도 뻔뻔스러운 대답이라 힐끔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남자는 갈색의 루이비통 담배 케이스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고 있었다. 수진의 시선을 느낀 남자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이야기를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기대었다. 선이 분명한 분홍빛의 부드러운 입술 사이로 내뿜어지는 담배 연기가 이상하게 나른하고 섹시해 보였다. 앞에 앉은 남자를 품평하듯 쳐다보고 용건을 잃고 있는 자신을 얼른 추스르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