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사랑하지도, 받지도 못하는 그런 사람

스무 살의 성연은 부지런히 악기들에 쌓인 먼지를 닦아 냈다. 매일 닦는 데도 어디서 나오는 먼지들인지 늘 노란 걸레에 까맣게 묻어나는 악기 구석구석의 먼지들이 성연은 신기했다. 아마도 사장님이 차가 쌩쌩 다니는 도로 옆의 가게임에도 불구하고 자주 문을 열어 두어서일 거라고 생각해 보았다. 자동차에서 나오는 먼지와 가스들이 날아들어, 청결해야 할 악기들 위에 안착하는 거라고 밖에는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성연이 늘 피아노의 뚜껑을 닫아 두어도 어느새 나타난 사장은 피아노의 뚜껑을 열어 두었다. 건반 위에 쌓이는 먼지들을 일일이 닦아 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건반 사이사이에 끼는 먼지들이 악기에게도 좋을 리 없건마는, 지나가는 이들에게 피아노의 모든 것을 공개해야만 속이 시원한 사장은 성연의 말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장님, 건반에 먼지가 쌓인다구요! 출입문 열어 두시려면 피아노 뚜껑을 닫든지, 피아노 뚜껑 열어 두시려면 출입문을 닫든지, 둘 중 하나는 선택하셔야 해요!”

“너… 빚쟁이들 들이닥친 분풀이를 나한테 하는 거 같다…!”

출근하면서 사 들고 온 복권을 긁어 대며 사장은 성연의 충고 따위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대신 빚쟁이들 이야기로 성연의 입을 다물게 해버렸다.

근 1년간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그들의 상판대기를 이제는 사장이 다 기억할 정도였다. 이 조그마한 악기 상점에서 알바를 해서 얼마나 번다고 그들은 이 작은 아이가 숨 쉴 틈도 주지 않으면서 찾아와서는 그나마 벌어 둔 알바비를 노리곤 했다.

사장은 성연을 보면서 굳게 결심한 것이 있었다. 자신은 절대로 사업에 망하지 않을 것이고, 빚을 자식에게 물려주지도 않을 거라고. 부모 잃고 홀로 된 것도 서러운 마당에 부모가 살아생전에 진 빚에 고통을 당하는 모양은 그 어느 누구도 지켜볼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장은 의외로 씩씩한 성연을 대견하게 여기고 그녀가 다른 알바를 구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시급을 줘 가며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저 기구한 운명의 아이가 ‘언제쯤 활짝 웃으며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부지런히 복권 사거라…! 내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길 말고는 해결책이 없다…!”

그래서 사장은 성연에게 틈만 나면 복권을 사라고 권했다. 성연 역시 앞날이 캄캄해 복권을 여러 번 사 보았다. 그러나 허탕을 칠 때마다 그나마 있던 복권 값이 날아간 것 때문에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모른다.

성연은 걸레를 내려놓고 피아노 앞으로 가서 앉았다.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는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 입시를 위해 수도 없이 연습했던 그 곡이 이제는 성연이 답답할 때마다 그 마음을 표출해 주는 곡으로 늘 연주되고 있었다.

성연이 격정적으로 연주하는 모습을 보며 사장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폭풍이 몰아치는 장면을 묘사하는 듯한 저 곡이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내리친 성연의 불행과 닮았다고 여기며 사장은 그저 성연의 연주를 들었다.

“아, 어서 오십시오, 사모님!”

넋을 놓고 성연의 연주를 듣고 있던 사장은 가게로 들어서는 긴 곱슬머리의 손님을 반갑게 맞이했다. 성연도 손님이 왔음을 알아차리고 연주하던 손을 멈추고 다시 걸레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사장이 손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구석으로 향하는데, 뒤에서 자신을 향해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훌륭한 연주였어… 이름이…?”

생글거리는 사장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녀는 구석으로 가던 성연에게 이름을 물었다. 성연이 의아해하며 돌아보았다.

“성연이요, 박성연….”

긴 곱슬머리가 등을 덮고 있는 그녀는 성연을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 성연은 영문은 모르겠지만 웃어 주는 이가 너무도 오랜만이라 그 웃음을 반갑게 받으며 덩달아 웃어 보았다.

“예쁜 아이구나. 마음도 예쁠 것 같고….”

자신을 칭찬해 주는 그 말이 성연은 신기했다. 자기가 꼭 하고 싶은 말을 그녀가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쁜 언니시네요. 마음도 예쁠 것 같아요.”

==========

성연은 천천히 눈을 떴다. 천장에 있는 형광등 옆에 낯익은 눈매가 보였다. 신영 언니? 아… 아니다. 긴 곱슬머리가 아니다. 짧은 단발머리를 한 혜빈이 걱정스럽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

“성연 씨! 괜찮아요? 이제 정신이 좀 들어요?”

그녀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에 성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병원…? 아… 성연은 감기 몸살 때문에 혜빈이 자신의 집으로 왔던 것을 기억해 냈다. 내가 또 쓰러졌었나? 왜 병원에 누워있는 거지?

일어나 앉으려고 하는 성연을 혜빈이 부축해 주었다. 성연은 다시금 병실을 둘러보았다. 에? 여긴 응급실이 아니라 입원실? 어리둥절해하는 성연에게 혜빈이 설명했다.

“갑자기 쓰러졌었어요. 나 문 열어 줄 때만 해도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었는데… 쓰러지는 바람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기억… 나요?”

성연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복지관에 출근하지 못하고 속상해하던 것까지 기억이 났다. 그런데… 어쩌다 쓰러지게 되었는지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