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손님 들어오세요.”'숙희는 다음 차례를 부르는 소리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소 무뚝뚝한 얼굴의 직원이 안내하는 방 앞으로 다가선 그녀는 열린 문틈으로 잠시 안을 살펴보았다. 평범한 방이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소박하고 깨끗한 방이었다. '숙희는 방안으로 천천히 들어가 직원이 가리키는 자리에 얌전히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앉아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갸름하고 고운 얼굴로 앉아있는 여자는 여느 점집에서나 볼 수 있는 점쟁이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처녀보살이라고 하니 당연히 결혼 안한 여자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예쁘고 젊은 아가씨일 줄은 몰랐다. '숙희는 속으로 놀랐지만 애써 침착하게 젊은 아가씨가 사주와 점괘를 읽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자식들 중에 유독 출중한 자식이 있군요.”'숙희는 순간 자제력을 잃고 놀란 얼굴을 하고 말았다. 보통 점집에 와서는 점쟁이가 사정을 비슷하게 알아맞히더라도 모른 척 시침을 떼야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이토록 정확하게 말한 점쟁이는 없었다. 그래서 숙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애써 놀라움을 삼키고 무심하게 대꾸했다.'“내 자식들이야 다 출중하다고 생각하죠.”'그러자 정말로 젊은 아가씨로 보이는 처녀보살이 웃었다. 보조개까지 들어가는 예쁜 얼굴이 빛이 나 보일 정도였다.'“다 같은 자식이라도 유독 기대하게 되는 자식이 있죠. 아주머니 경우에는 그 기대가 무척이나 크고.”'여자가 테이블 위의 구슬들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그런데 그 구슬들이 희한하게도 제멋대로 굴러가다가도 어느 순간에 멈춰 서버렸다. 그렇게 구슬들이 마치 제 자리를 찾아가듯 멈추어 서자 어떤 규칙적인 모양 같은 것이 만들어졌다.'숙희는 도저히 그 모양이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처녀보살은 아는 모양이었다.'“고생하네요.”'“누가요?”'숙희는 이 용한 처녀보살에게 저도 모르게 동화되고 있었다.'“귀한 따님이요.”'딸이라고 말한 적도 없다. 그런데 딸인 줄 어떻게 알았을까?'“오래된 인연이에요. 아주머니에게서 시작된 인연이 귀한 따님에게까지 내려왔어요. 인연의 고리가 이어져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그 인연이 우연으로 이어져 운명이 될 거예요.”'숙희는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늘어놓는 점쟁이를 무력하게 쳐다보았다. 그러자 여자가 또 웃었다.'“하지만 결국엔 다 잘 될 거에요. 식구들도 다 건강하고 행복하겠어요. 아주머니가 만들어놓은 인연 덕에 상처받고 아픈 따님도 행복해지고요.”'상처받고 아픈 딸? 유달리 아프고 상처받은 딸은 없다. 있다면 똑똑한 둘째 딸 덕에 큰 딸이 하고 싶은 걸 못한 것이 다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잡고 잘 살고 있고 좋은 남자 만나 결혼도 할 생각이다. 그러니 점쟁이가 말하는 그 아픈 딸이 큰딸일 리가 없다. 그럼……?'숙희는 정작 묻고 싶어 왔던 둘째 딸 이야기를 물었다.'“제가 알고 싶은 건 유학 갈 준비를 하는 제 둘째 딸 얘긴데요. 하버드에 지원할 생각인데 어떻게, 될까요?”'그러자 여자가 고개를 흔들었다.'“다 잘 된다니까요. 아주머니가 조금만 욕심을 버리시면 행복은 더 빨리 찾아올 거예요. 따님의 상처도 금방 아물 거고요. 물론 힘든 시련도 있지만 결국은 아주 많이 행복해져요. 하늘에서 만난 귀인이 따님의 앞날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겁니다.”'하늘? 이 무슨 벼락 맞을 소린가? 하늘이라니. '“설마 그 말은 우리 딸이…….”'섬뜩한 생각에 숙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처녀보살이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아뇨, 그런 하늘이 아니라……호호, 걱정 마세요. 따님도 오래 살 거니까.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 거예요.”'짜증이 났다. 괜한 헛소문이었던가 보다. 시험 합격 여부는 기본이고 사업이 될지 안 될지도 단박에 알아맞히는 용한 점쟁이라고 해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왔는데 괜한 걸음을 한 것 같았다.'숙희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맙습니다.’ 하고 일어섰다.'묻는 말에는 대답을 못하고 괜한 인연 타령이라니. 누가 그딴 것이 궁금하다고 했다고.'한숨을 푹 쉬며 나가는 숙희는 자신의 뒤로 처녀보살의 고운 얼굴에 오랜만에 하얀 웃음꽃이 피는 것을 보지 못했다.'''“여보세요?”'[뭐해?]'“뭐하긴. 저녁거리, 뭐 할까 고민 중이다.”'숙희는 콩나물을 다듬으며 전화기를 어깨에 꼈다.'[너도 그런 거, 고민해?]'“주부가 그런 거 고민하는 거 당연하지.”'[얘! 네가 보통 주부니? 하버드대 장학생 딸을 둔 네가 우리 같은 아줌마와 같은 고민을 해서야 되겠냐, 이 말이야.]'순간, 숙희의 얼굴에 은근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둘째딸 이야기만 나오면 입이 헤벌쭉 벌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아유, 얘는.”'그래도 너무 잘난 척하는 것 같아 보일까봐 애써 겸손한 목소리를 냈다.'[얘들이 아주 난리다 난리. 효선이, 이번에 하버드 우등으로 졸업했다면서?]'“그러게. 기대도 안했는데 그랬다더라고.”'아닌 척 하며 목소리를 덤덤하게 냈지만 30년 지기 친구는 대번에 눈치를 챘다.'[내숭은! 내 앞에서는 잘난 척 좀 해도 돼. 아니지. 그 정도면 누구 앞에서든 잘난 척 해도 되겠다, 얘. 하버드에 들어간 것만도 대단하다고 했는데 우등 졸업이라니. 아유, 내가 배가 아파서 못 살아.]'“그런 말 마. 애가 고생하는 거, 지켜보면서 그동안 얼마나 노심초사했는데……. 하버드가 내 딸 잡는 거 아닌가, 했다.”'[그래도 결과가 좋잖아. 네 딸이니까 그만큼이라도 한 거야. 어렸을 때부터 얼마나 똑똑했니?]'“뭘 그래? 너희 애도 이번에 취직했다면서?”'[그깟 통신회사에 취직한 게 자랑거리나 되니? 그것도 졸업하고 2년이나 핑핑 놀다가 겨우 한 취업인데.]'“그런 소리 마. 요즘 취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그렇긴 하지만……에휴, 넌 좋겠다. 네 딸은 이제 졸업했으니 오라는 데도 많을 거 아냐? 그 어려운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했으니 서로 모셔 가려고 난리 치지 않아?]'“난리는 무슨. 좀 더 공부 시키려고.”'숙희는 자꾸만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아니라고 겸손을 떨지만 사실, 다른 친구들보다 월등하게 잘난 자식을 둔 어미의 자만심이 그녀의 심장을 뻐근하게 눌렀다.'[뭐? 무슨 공부를 또 시켜?]'“이왕 한 공부 조금 더 해서 박사까지는 돼야지.”'[어머! 그럼 물리학 박사?]'“그렇지.”'뿌듯한 얼굴로 숙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세상에! 그럼 박사 된 후엔 뭐 하는데?]'“글쎄, 아직은 모르지만 교수나, 나사에 들어가서…….”'[나사? 그 미국항공우주국, 그거?]'“응. 아무래도 전공이 전공이니까.”'[어머, 어머! 세상에. 너희 딸 진짜 유명인사 되는 거 아냐? 너, 진짜 좋겠다. 잘 키운 딸 하나가 열 아들 안 부럽다더니 네가 딱 그 짝이다.]'“호호, 돼야 말이지.”'[졸업했는데 효선인 안 들어온대?]'“들어올 거야. 미국에서 살았어도 학교 밖으로는 잘 나가보지도 않은 애잖아. 그래서 여기저기 여행한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지. 조만간 들어와서 쉴 거야. 대학원 개학하면 다시 나가야하니까 그동안 애 몸보신도 좀 시키고……걔 들어오면 나도 바쁠 거야.”'[기집애, 너하고 인숙이는 정말 좋겠다. 우리 동창들 중에서 너하고 인숙이가 제일 자식농사 잘 지었어.]'“인숙이?”'[그래. 김인숙. 그 새침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