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94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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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두근거린다. 몸이 침착성을 잃고 흔들리는 걸 느끼면서, 수정은 심호흡하며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자 했다. 수정이 속한 대열이 전진하고 있는 6차선 도로의 50여 미터 전방에는 새까만 물결을 이룬 전투 경찰들이 방패를 잡고 대열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뿜어내는 까만 무채색의 공포가 수정의 마음에 균열을 일으켰다.

대열을 따라 발걸음은 옮기지만 내심 대열이 그만 멈추기를 바라며 수정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수정과 친한 낯익은 얼굴들 속에 가두시위의 경험이 많지 않은 신입생들이 섞여 있었다. 어설픈 몸짓으로 구호를 따라 외치면서도 눈은 전방을 향해 불안스럽게 뻗어 있다. 그들도 더는 전진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1년 이상 학교의 물을 먹었다고 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얄미울 정도로 침착하고 힘이 넘쳐 있었다.

수정은 고개를 약간 뒤로 돌려 친구인 현주를 보았다. 침착한 표정. 두려움이라곤 없었다. 그러는 사이 대열에는 약간의 변동이 생겼다. 지금까지 대열의 앞에서 구호를 외치며 그들을 이끌었던 사람이 바뀐 것이다. 새로 나선 사람은 신유성으로 그녀와 현주가 속한 인문대학의 학생회장이었다. 그가 주먹 쥔 손을 하늘을 향해 높이 치켜세우며 쩌렁쩌렁하게 구호를 외쳤다.

“천만 농민 다 죽는다! UR(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철회하라!”

수정도 주먹을 높이 올리며 구호를 따라 외쳤다. 그동안에도 대열과 전투 경찰과의 거리는 점점 좁혀져 검은색 덩어리로 보이던 전투 경찰들이 이제는 개개로 분리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쓰고 있는 방독 마스크의 파리 주둥이 같은 공기 필터도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수정의 심장이 거칠게 박동했다. 후배들이 같이 있기에 내색을 하지 않지만 이렇게 전투 경찰들과 대치할 때면 여전히 무섭고 몸이 떨렸다. 다른 사람들을 따라 손을 하늘로 치켜 뻗어도 입술을 열어 구호를 외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어디까지 가는 거야?”

긴장을 견디다 못한 수정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 계속 전진하던 대열이 우뚝 멈췄다. 화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공기의 흐름을 타고 날아온 백색의 연기가 거칠 것 없이 나아가던 대열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미리 준비한 화장지와 마스크를 꺼내 코와 입을 막으며 수정은 숨을 조절했다. 공포로 인해 야생마처럼 날뛰던 심장이 지금 이 순간 진정되면서 차분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드디어 시작이라는 생각에 두려움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라 치솟는 아드레날린이 두려움을 가리는 것이었다.

화장지와 마스크의 미세한 틈을 파고들어 수정의 비강까지 침입한 최루가스는 코가 타는 것 같은 고통을 안겨 주었다. 눈물과 콧물이 솟구치고 재채기를 하면서 수정을 비롯한 사람들이 몸을 뒤로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최루가스가 묻어 화끈거리는 얼굴을 더욱 따갑게 만들었다.

수정은 자기 옆에 있던 1학년 여학생의 손을 꼭 잡고 뛰었다. 후배의 손을 잡자 두려움은 더욱 옅어졌다. 책임감이 몸과 마음에 힘을 북돋웠다.

본 대열이 도망치고 있는 사이 사수대 남학생들은 어느새 따로 빠져나와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투 시작이었다.

숨 가쁜 전투가 끝나고 인근 전문대학에 그들은 모여 앉았다. 요행히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고 호의적인 시민들의 반응에 사람들은 힘이 난 표정이었다. 수정도 마찬가지로 흥분이 아직 가라앉지 않아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현주의 옆자리에 앉았다.

쇠파이프를 들고 전경과 직접 대치했던 선봉의 남학생들이 들어오자 학생들이 박수와 환호로 그들을 맞아주었다. 그들이 묻혀 온 알싸한 최루가스 냄새에 다시금 재채기하며 수정은 몸을 움직여 그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텄다. 이제 정리 집회를 할 시간이었다.

수정은 피곤한 몸을 계단의 난간에 기대 쭈그려 앉았다. 어서 끝내고 집에 가고 싶었다. 그렇게 딴생각에 빠져 있느라 앞으로 나선 사회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때 사람들 속에서 함성이 일더니 대열 속에 있던 4명의 남학생이 일어나 앞으로 나섰다. 사회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듣지 못했던 수정은 피곤으로 풀린 눈을 들어 그들을 보았다. 본 적이 없는 얼굴들이었다. 그중 한 명은 키가 매우 커서 유난히 두드러져 보였다. 사람들이 노래를 불렀고 4명의 남학생은 그에 맞춰 우스꽝스럽고 유쾌한 율동을 선보였다.

수정은 키 큰 남학생을 쳐다보았다. 그는 멀대같이 큰 키의 소유자로 함께 율동을 하는 남학생 중 유독 눈에 띄었다. 온몸으로 끼를 발산하는 그.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섬광처럼 가슴을 스쳐 지나가고, 수정은 멍하게 키 큰 남학생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단순히 웃고 즐기는 가운데 한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런 감동이 아니었다. 잠시 시간이 정지한 듯했다.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이 희미해지는데 그 남학생만이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였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의문뿐이었다.

‘누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