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뒤로 하얗게 부서지는 물살이 길게 이어졌다. 첫 배편은 그다지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텅 빈 객실을 지나쳐 뱃머리에 서자 제법 선선한 바람이 옷 속을 파고들어 오소소 소름까지 돋았다.'“후우.”'여름의 끝자락, 폐부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다가 내쉬는 숨결에도 시원한 바다 냄새가 묻어났다.'갑자기 차를 타고 통영에 도착해서 욕지도행 배를 탈 때까지도 모친인 정 여사는 도대체 무슨 일이냐는 질문에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다 어젯밤에야 겨우 10시 전에 퇴근할 수 있었다. 두 달 전부터 도와주고 있는 교수님 논문 작업이 막바지라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낸 데다 월말이라 피부관리 숍도 물건 잔고 확인과 영수증 처리서부터 정리해야 할 일이 제법 많았다.'오피스텔로 갈까 하다가 정 여사가 이틀째 잔소리를 해 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본가인 신수동으로 차를 몰았다. 늦은 시간이 되도록 저녁도 먹지 않았지만 배고픈 것보다 잠이 먼저였기에 씻고 막 침대로 기어 올라갔는데, 정수희 여사가 노크도 없이 들어왔다.'『가자.』'달랑 그 한마디를 하고 심상치 않은 얼굴의 정 여사는 얼른 갈아입으라며 침대 위로 티셔츠와 바지를 던진 뒤, 옷장을 열고 손에 잡히는 대로 가방을 채웠다.'채 10분도 안 되는 사이에 영문도 모른 채 정 여사에 의해 차에 태워졌고, 밤새 고속도로를 달려 통영에 도착했다. 그리고 어느새 욕지도를 향해 가고 있다.'이렇게 뿌옇게 밝아 오는 새벽 바다를 보고 있으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피곤한데 들어가서 앉아.”'“이유는 말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니야? 갑자기 통영은 무슨 일이고 욕지도는 왜 가는 건데?”'“…….”'“엄마.”'“널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누가 왜’라는 질문을 하려다 은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 시선을 슬쩍 피하는 걸 보니 왠지 묻지 말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어둠을 완전히 밀어내지 못한 주변은 희뿌연데, 바다는 진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배가 제법 속도를 내고 있는지 듬성듬성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섬들이 휙휙 지나쳐 갔다.'“은아, 그게…….”'그 밤에 이렇게 달려오게 만든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지만, 망설이는 모습을 보니 은근히 불안하기까지 했다.'늘 당당하라고, 자신을 바로 세우는 건 누가 대신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언제 어디서든 부당함에 맞설 수 있는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어릴 적부터 수도 없이 정 여사에게 듣고 자랐다. 정 여사는 아이의 엄마로서 홀로 딸을 키우는 여자로서 절대 약하지 않았다. 어느 땐 존경을 넘어 같은 여자로서 부러운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그런데 웬 눈치? 웬 망설임?'“누군지 꽤 대단한 사람인가 보네. 반대로 난 그 대단한 사람이 손가락을 까닥거리면 쪼르르 달려가는 인형인 거고.”'“무슨 말을 그렇게 해!”'그냥 한번 찔러 본 건데, 고개까지 홱 치켜들고 목소리를 높이는 걸 보니 영 꺼림칙했다.'“아니면 보고 싶어 해 주는 것만으로도 황송해야 하는 거예요?”'“…….”'뜸을 들여도 너무 들이네. 어차피 도착하면 알게 될 텐데 그만둘까 하는 생각이 들던 차였다. 설사 만나기 싫은 사람이라도 배까지 타고 섬으로 들어가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회장님이 널 보고 싶어 하셔.”'훅하고 들이켠 숨결이 폐부를 찔렀는지 바싹 오그라드는 통증이 느껴졌다. 배 모서리를 잡고 있는 작은 손이 탈색이 된 듯 하얗게 변했다. 고개를 돌려 바다를 노려보자 푸른 물속을 하얗게 떠다니는 해파리 떼들이 보였다.'잘못 들은 거겠지. 이건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사람치곤 너무 심하다. 회……장님이라니.'“무슨 자격으로.”'은은 이를 악물고 겨우 말을 뱉었다.'“내 앞에서 그 사람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날이 엄마하고 나하고의 인연도 끝이라고까지 했는데 잊은 거야?”'“건강이 안 좋으셔. 그러니까…….”'“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목소리가 너무 차분하고 고요해서 누군가 스치듯 봤다면 두 모녀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표정은 얼음을 끼얹은 듯 차가웠고 어깨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당장 욕지도가 아닌 반대 방향으로 배를 돌리라고 목청껏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아니, 수영이라도 할 수 있다면 뛰어내리고 말았을 것이다.'“기회가 늘 있는 게 아니잖니.”'기회? 무슨 기회?'“우리 이러지 않기로 한 것 아니에요?”'“널 데려간다고 했어.”'“누구 맘대로 날 데려가고 말고 해요. 내가 세 살 먹은 어린아이예요? 가고 싶으면 혼자 가면 되지, 왜 나까지 귀찮게 해.”'“은아.”'“싫다고 했잖아요!”'버럭 내지르는 소리에 건너편에 서 있는 두 남녀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침착해야 하는데. 화를 낼 필요도, 그럴 가치도 없는 사람인데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올라갔다. 커다란 눈망울이 아침 햇살보다 더 반짝거렸다. 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은아, 제발. 이번 한 번만 엄마 말 좀 들어줘. 응?”'“가고 싶으면 혼자 가라고 했잖아. 내가 언제 그 사람 만나는 것 반대한다고 했어요? 만나요. 만나서 하고픈 대로 하라고.”'“지금 그런 말이 아니잖아.”'“알 게 뭐야. 기억에도 없는 그런…… 사람을 나보고 어쩌라고. 난 싫어요.”'차라리 기억에 없다면, 존재 자체도 몰랐다면. 그랬으면 좋았을걸.'아빠 없는 아이라고 놀림을 받을 때도 기가 죽거나 슬프지 않았다. 이상하게 아빠가 없다는 게, 엄마 혼자서 자신을 키운다는 게 그냥 받아들여졌다. 아빠라는 존재는 기억하고 추억할 그 무엇도 없는, 그저 가끔씩 막연한 그리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철모르던 어린아이였을 때지.'은은 입술을 삐딱하게 끌어올렸다.'“기억에 없다고 아빠가 아닌 건 아니잖아. 널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분이야. 그런 분이 보고…….”'“난 원한 적 없어.”'“뭐?”'“태어나게 해 달라고 바란 적도, 원한 적도 없다고.”'느슨하게 땋아서 허리에서 한 뼘 위까지 내려온 긴 머리카락이 오늘따라 성가시게 느껴졌다. 일부러 길러야지 하고 기른 게 아니라 미용실에 가는 게 귀찮았을 뿐인데, 언제부턴가 자신 또한 은근히 머리카락이 자라는 걸 지켜보는 게 즐거웠다. 대학 입학을 하고부터였으니 벌써 몇 년째인가.'“말이면 단 줄 아니? 네가 아직도 철부지 어린아이야? 도대체 언제까지…….”'“철부지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이 정도지. 생명 하나만 달랑 던져 놓으면 끝인 줄 아는 그런 사람에게 내가 고마워라도 해야 하는 거예요? 아니, 난 눈곱만치도 그런 마음 없어요.”'“나은!”'“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요!”'나은, 빌어먹을 나은. 그렇게 불리는 게 싫었다. 그래서 싸웠고…… 이겼다. 이젠 누구도 자신을 나은이라고 부르지 않는다.'“한 번만 더 그렇게 부르면 엄마고 뭐고…… 없을 줄 알아요.”'싸늘한 시선만큼 뱉어 내는 목소리도 냉기가 뚝뚝 흘렀다. 평소의 정 여사라면 이쯤에서 조용히 물러났을 텐데 오늘은 아마도 작정을 했나 보다.'“한 번만, 이번 한 번만 만나자.”'“싫어. 결국 한 번이 두 번, 세 번이 될 거고, 또…….”'“약속할게. 이번 한 번만 엄마가 하자는 대로 해 줘.”'“그 말을 어떻게 믿어? 다시 이런 일 없으란 법 없잖아. 난 그쪽 누구하고도 엮이기 싫어. 다시 말하지만 난 절대 안 가요.”'홱 돌아서는 그녀를 정 여사의 손길이 빠르게 낚아챘다. 은은 숨을 거칠게 내쉬며 천천히 돌아섰다.'“혹시 콩고물이라도 떨어지길 기다리는 거예요?”'“뭐?”'“아니면 새삼스럽게 안방마님 자리에 욕심이라도 난 거야? 도대체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