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갔구나, 결국.”'“앞으로 전화하지 말고 편지 쓰라고 전해 달래요.”'“누가 요즘에 편지를 써? 메일을 쓰지.”'“그건 성의가 없다고 메일 쓰면 무시해 버릴 거랬어요.”'헨리는 이현의 머리를 매만지며 소파 등받이에 고개를 기댔다. 이현은 가만히 무릎을 세워 끌어안고 그 위에 턱을 기대었다. '앤드류가 가고 자꾸만 정신이 멍해지며 넋을 놓는 때가 많아졌다. 워낙에 강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고 그동안 그가 미친 영향은 가는 순간까지도 막대해서 왠지 허탈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앞으로의 길과 찾아야 할 음악, 그리고 헨리에 대해서.'촉. '헨리가 볼에 입을 맞추는 소리에 그녀는 상념에서 깨어났다.'“뽀뽀 그만 하랬죠.”'“언제?”'“생각 안 나는 척 하지 말아요. 분명히 아침에 그랬잖아요.”'테라스 문 앞에서 키스를 하고 마음을 확인한 후,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입을 맞추려고 했다. 아침에 나갈 때도 촉, 들어와서도 촉, 설거지하는데도 촉, 피아노 치는 데도 촉, 그만 하라고 하면 등을 꼭 껴안으며 못 들은 척 하기가 다반사였다.'“나 지금 우울하단 말이에요.”'“왜? 앤드류 가서?”'끄덕끄덕. '헨리는 포크로 딸기가 송송 얹어진 딸기 크림 케이크를 먹기 좋게 잘라 이현의 입 안에 넣어 주었다. 달콤한 것이 들어가서 기분 좋아지라면서 계속 밀어 넣었다. 우물우물 거리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그가 다시 케이크를 입 앞에 갖다 대자 이현은 왠지 모를 서러움이 복받쳤다. 그래서 심통 맞게 케이크 크림을 손에 묻혀 헨리의 볼에 칙 문대었다.'“어어…….”'그가 황당한 얼굴로 볼을 슥 닦아냈다. 질척하게 묻어오는 상큼한 딸기 향을 어이없이 내려다보던 헨리는 휴지로 크림을 닦고 이미 2층을 향해 도망가고 있는 이현의 뒤를 성큼 쫓았다. 이현은 필사적으로 달려 계단을 올라갔지만 그라운드의 제왕인 그의 스피드를 이길 수는 없었다. 허리를 휘감는 강인한 힘에 그녀의 몸이 휘청거렸다.'“앗!”'웃음소리도 잠시,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우당탕하는 소리가 집 안에 가득 찼다.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가는 그녀를 받아 안느라 헨리도 부지불식간에 중심을 잃으며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이현은 아래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것이 그의 몸임을 깨닫자마자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헉, 헨리. 괜찮아요? 어디 안 다쳤어요?”'“윽…….”'“다친 거 아니에요? 어디 봐요.”'작은 신음 소리를 몇 번 내주었더니 그녀는 깜짝 놀라 안절부절못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하지만 이내 팔을 잡아 저지하는 힘에 그의 위에 올라탄 상태로 움직임을 멈췄다. 헨리는 씩 웃으며 몸을 한 바퀴 돌려 이현을 바닥에 눕히고 팔을 바닥에 짚은 채 몸을 포개었다.'“이런 걸로 다치면 몸싸움 몇 번에 입원했게.”'“소리가 크게 나서…….”'“괜찮아. 것보다, 흐응.”'묘한 소리를 내며 그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왼손 검지에 동그랗게 묻어 있는 딸기 크림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휙휙 돌아다녔다. 이현은 질색을 하며 몸을 바둥대었다.'“항복, 항복요. 잘못했어요.”'“흐음, 이미 늦었는데. 잘못한 게 그것뿐인 줄 알아?”'“그럼요? 난 잘못한 거 없어요.”'또랑또랑한 대답에 괘씸함을 느낀 헨리가 딸기 크림을 똑같이 그녀의 볼에 묻혔다. 이현이 늘어지는 소리로 반항하는데도 사악한 웃음은 그칠 줄 몰랐다. '“왜 잘못한 게 없어? 내가 옆에 있는데도 다른 남자 생각하면서 시무룩하기나 하고.”'“아니 그럼 애초에 선생님은 왜 데려와서……읏.”'“그래서 지금 반쯤은 후회를 하고 있다고. 배 아파서.”'그가 혀끝으로 볼에 묻은 크림을 핥기 시작했다. 할짝대는 민망한 소리와 부드러운 혀의 감촉에 이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뺨에서 한참을 머물던 입술이 달콤한 딸기 크림맛과 함께 그녀의 입술을 비비며 혀가 파고들었다. '타액이 섞이고 혀가 야릇하게 맞닿았다. 눈을 감은 채 그와 키스를 하면서 이현은 조금씩 형체를 드러내는 마음에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더 이상 외면하거나 미룰 수 없음을, 자신을 똑바로 봐야 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그런데 일은 엉뚱한 곳에서 잘못되기 시작했다. '그날은 무슨 일인지 훈련이 끝나면 칼같이 돌아오던 헨리가 오후가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마이클과 함께 있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은 이현은 헨리가 없는 동안 마음 놓고 인터넷을 뒤져가며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헨리와 스캔들이 난 후 뒤이어 줄줄이 터진 퍼드와 카를로의 섹스 스캔들이나 존의 폭행 사건 말고도 첼시의 주장 슈나르의 이혼 소식이 언론을 장식하자 어느 정도 소란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것 같았다.' '‘내가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편곡할 수 있었던 건……마음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야. 세상의 어떤 소리도 도달하기 힘든 가장 밑바닥, 심연에 이르지 않고는 들을 수 없는 음이지.’''한 발을 내딛었어도 아직 용기가 부족했다. 앞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지 알고 있으면서도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피아노로 인해 또다시 사람들의 부담 어린 시선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앤드류의 말이 그녀를 끊임없이 갈등하게 만들었다. '가장 도달하기 힘든 밑바닥, 심연의 음이라…….''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International Tchaikovsky Competition' '개최일 : 6/8 - 6/30 '개최지 : 러시아 모스크바 모스크바국립음악원'개최부문 :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성악'접수 및 일정 : 12/1 까지 신청서 및 지정곡 연주를 녹화한 DVD나 녹음CD ''그가 말한 음을 반드시 콩쿠르를 통해 찾게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음악을 두고 경쟁을 하면서 가장 밑바닥의 음악을 찾는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으니까. 하지만 음악을 향한 길이 콩쿠르를 거쳐도 좋은 것이라면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또 지금 당장은 찾기 힘들어도 앞으로 가는 어느 길에서 찾을 수도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현은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 대한 정보를 간략하게 메모해 놓았다. 12월 1일까지 신청이라면 아직 열흘 정도 시간이 남아 있었다. ''헨리는 몰리와 면담을 하기 위해 마이클과 그녀의 가게에 앉아 있었다. 안 그래도 이현의 일로 조만간 헨리를 봐야 할 것 같다는 몰리의 말을 기억한 마이클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빛이 나는 친구의 얼굴을 웃으며 쳐다보았다.'“그렇게 좋냐?”'“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야, 정말 내가 믿을 수가 없어서 그런다. 이래도 뚱, 저래도 뚱, 여자에 별로 관심을 안 보여서 내가 너 거기에 문제가 있나 싶었다니까.”'“멀쩡하거든? 안 그래도 요즘 고행 중이라서 힘들어.”'불만스러운 목소리에 마이클의 표정이 기묘해졌다.'“엑. 그럼 아직이냐?”'“너처럼 기다림의 미덕을 모르는 야만인이 아니라는 뜻이다.”'마이클은 하루도 몰리를 안지 못하면 잠을 못 자는 자신의 상태와 비교해서 너무도 건전한 헨리를 뜨악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래. 그런 것 같구나. 어떻게 같이 산 지 석 달이 다 되가는데 눈앞에 두고도 참을 수가 있냐. 독한 놈. '“내가 손수 갖다 바쳐야 하는 건 아니지?”'주방 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마이클이 헨리를 툭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해 두지만 너 먹을 건 알아서 갖다 먹는 거다.”'“서비스가 엉망이군.”'주방과 홀을 연결하는 테이블 위로 음식이 담긴 접시가 나와 있었다. 헨리는 접시를 잡으려다 메시지가 온 휴대전화를 꺼내들고 내용을 확인했다.'[어디에요?]'자동적으로 그의 입가가 슥 올라갔다.'[음, 몰리 가게.]'[늦어요?]'[조금. 저녁 전에는 갈 거야.]'[올 때 전화해요.]'마이클이 접시를 옮기다 말고 휴대전화에 빠져 있는 헨리에게 툴툴대었다.'“정신 좀 차리시지.”'“너나 잘해.”'헨리가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놓고 같이 접시를 나르는 모습을 지켜보며 몰리는 근심 어린 얼굴을 펴지 못했다. 정말 내가 괜한 짓을 한 건 아니겠지. 저렇게도 좋아하는데. 정말 에일린이 그 남자 때문에 헨리를……. '남몰래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그녀의 속내도 답답했다. 처음 계획만 해도 이게 아니었는데.'“아, 에일린 피아노 선생님 갔다며? 앤드류 로이드였던가.”'“응. 그 이후로 연습 엄청 열심히 하고 있어. 들을수록 놀라고 있다, 요즘.”'“그 정도야?”'“3년 동안 쉬어서 테크닉이나 힘이 많이 달리는 것 같다고 모래주머니까지 차고 맹연습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