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여보세요?” '모처럼 쉬는 날이라 집에서 달게 낮잠을 자던 화은은 전화벨 소리에 인상을 찡그리며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다.'“화은이니? 목소리를 보니 자고 있었나 보네? 전화소리 때문에 깼어?” '오빠 친구 준혁 오빠였다. 꿈에서라도 들어 보고 싶었던 목소리였는데 너무 갑작스러운 나머지 반가움보다는 퉁명스런 대답이 먼저 나왔다.'“준혁 오빠구나. 그런데 지금 집에 나 밖에 없는데…….”'“너한테 볼 일 있어 전화 했어. 오늘 쉬는 날이지? 별일 없으면 나와라. 오빠랑 저녁 먹자.”'생각해 볼 것도 없이 예스라고 외치고 싶은데 며칠 전 자신의 친오빠인 진수가 한 말이 생각났다.'‘준혁이 이제는 네가 생각하는 옆집 오빠 아냐. 우리나라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재벌그룹의 사장이야. 널 어릴 때부터 봐 와서 그런지 너한테 정이 많이 들어서 이것저것 챙겨 주는 모양이던데 바쁜 사람 오라 가라 하지 마라. 준혁이가 불러도 나가지 말고 너 또한 준혁이 불러내고, 찾아가서 바쁜 시간 빼앗지 마. 지금 걔가 얼마나 바쁜지 나도 옆에서 보기가 너무 안쓰럽다. 너 때문에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 너까지 거들지 않아도 충분히 힘들단 말이야. 무슨 소린지 알지?’'“치! 오빠는 내가 모처럼 쉬는 날 스케줄도 없을까 봐? 내가 오빠 심심풀이 땅콩인 줄 알아? 좀 이따 친구들 만나러 나갈 거야. 늙다리한테 밥 얻어먹는 거 이제 슬슬 지겨워졌다고 내가 얘기 안 했나?”'눈물이 나려는 걸 억지로 참고 맘에 없는 소리를 하는 자신이 너무 싫었다. 준혁에게 전화가 오면 어떻게 받아넘겨야 하나 그동안 고민 많이 했었는데 일단은 어색한 티 나지 않게 잘 말한 것 같았다. '“시간 없으면 그만이지 늙다리는 또 뭐냐? 알았다. 요즘 너, 통 전화도 없고 오지도 않고 해서 오빠한테 뭐 서운한 거 있는 줄 알았는데…… 오빠, 섭섭해지려고 한다. 또 전화하마. 네 생일도 다 되고, 졸업식도 다가와서 겸사겸사 보려고 했더니. 끊는다.”'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준혁의 목소리는 실망이 가득했다. '전화를 끊은 화연은 망연자실하게 앉아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지도 못하고 마음속으로 진수를 한없이 원망했다. 준혁 만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아려 왔다. 철들기 전부터 오빠 친구라기보다는 남자로서 가슴에 담아 왔다. 오빠 친구라는 미명하에 있지도 않는 이유를 들이대며 얼굴 한 번 보겠다고 바쁜 준혁을 찾아다녔던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준혁에게 자신은 오로지 친구 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더욱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준혁에 대한 화은의 일편단심 사랑.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녀에게 남자라고는 오로지 준혁뿐이었다. 화은의 오빠인 진수는 중학교 때 준혁을 만나 지금까지 형제보다 진한 우정을 이어 왔다. 어릴 때는 거의 진수 집에서 살다시피 하던 준혁을 오빠라고 부르며 따랐던 화은. 준혁은 그런 그녀를 친오빠인 진수보다 더 잘 챙겨 주고, 보살펴 주었다. 더욱이 오빠와 8살이라는 터울 때문에 그녀는 진수와 준혁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