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에서 지고 난 후를 겪어봤니?”'선우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자 민준이 싸늘한 얼굴로 차갑게 말을 뱉었다.'“아니, 일생일대의 도박에서 진 사람이 떠나고 그 이후를 감당해 본 적 있어?”'내면 깊숙이에서 터져 나오는 듯한 그의 말투에 선우가 그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 안타까움이 묻어나려 하자 민준이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그의 눈동자 속에 광폭한 기운이 감돌았다.'“아이가 어떻던? 모든 걸 감수할 생각이었다고?”'“그래요.”'경련하듯 떨리는 입술로 그녀가 대답했다. 그러자 민준이 꽉 잠긴 웃음소리를 흘리는가 싶더니 그녀의 양쪽 어깨를 잡고 거칠게 흔들며 소리쳤다.'“네가 감수라는 의미를 알아아아? 그게 어떤 건지 네가 겪어나 봤어어어어!”'난폭하게 그녀를 흔들어대는 그에게 선우가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을 사랑했단 말이야아아! 난 당신 기분 좋을 때만 만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란 말이야. 당신 옆에서 내가 얼마나 공허했는지 알아?”'비통하게 울음을 터뜨리던 선우가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며 속삭이듯 중얼거렸다.'“당신을 너무나 사랑했어. 당신이 나에게 모든 것이었기에 나도 당신한테 모든 것이길 바랐어.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거야?”'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듯 강하게 움켜쥐고 있던 그의 두 손이 조금씩 힘이 빠지는가 싶더니 그녀에게서 손을 떼고 물러났다. 민준이 그녀에게서 떨어지며 힘없이 중얼거렸다.'“그래, 그래서 놔줬잖아. 너한테 모든 걸 줄 수 있는 남자를 만나.”'오랫동안 속에 안고 있던 말들, 차마 내밀지 못하고 품고만 있던 말들을 끄집어내고 있는 지금 민준이 비켜가듯 조용히 정리시켜 버렸다. 추하고 망가진 얼굴을 보이더라도 감정이라는 것, 속내라는 것을 보이며 정면으로 부딪치고 있던 선우는 그 말에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닫았다. 어느새 격해 있던 눈빛은 탁하게 메말라 갔고, 울음을 삼키던 입술은 차분하게 다물어졌다. 그녀가 말없이 바닥을 응시하며 이 정적이란 이름의 어긋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무언가를 더 쏟아내기 위해 노력하거나 민준에게서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제스처를 취하지 않고, 언제나 반복되어 버리는 이 경계 어린 침묵을 똑바로 응시할 뿐이었다.'“그게 나한테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인가요?”'무겁게 가라앉아 버린 방 안 공기 속으로 슬플 정도로 담담한 그녀의 목소리가 떠돌았다. 공기 속을 떠도는 그 목소리에 민준의 목소리가 주변을 맴돌았다.'“민우가 죽으면 나는 내가 가슴을 치고 후회하며 울 줄 알았어.”'동문서답처럼 흘러나오는 민준의 말에 선우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민준은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사람처럼 다른 곳을 의미 없이 응시하고 있었다.'“그 아이가 죽어줬으면 하는 생각을 했었거든. 그런데 여전히 바뀌지 않더라. 민우가 죽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속이 시원하고, 홀가분할 뿐이야.”'서늘한 바람처럼 흘러나오는 민준의 씁쓸한 목소리에 선우가 중얼거리듯 말을 건넸다.'“아무도 당신을 욕할 수 없어요.”'위로하듯 그를 옹호하는 선우의 말에 그가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더니 공허한 웃음을 입술에 머금었다.'“상관없어, 욕을 하든 말든.”'누군가의 시선을 신경 쓸 만큼 그는 여유롭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누군가의 시선을 신경 쓸 만큼 열려 있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초연한 듯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서 스며 나오는 스산한 고독의 그림자에 선우는 그를 감싸듯 부드럽게 말했다.'“민우, 그 아이도 당신을 이해했을 거예요.”'의미를 알 수 없는 무감각한 기운이 그의 얼굴에 감돌았다. 가라앉듯 아래로 내리깔려진 그의 두 눈동자가 굳어지는가 싶더니 눈 주위가 짧은 순간 경련하듯 파르르 떨었다.'“이해 못했다 하더라도 상관없어. 이해를 하든 안 하든 바뀌는 건 아니니까.”'타인이란 존재와의 소통이, 그리고 마음을 나눈다는 것이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 의미가 있음을 말하던 선우에게 그는 의미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며 그 앞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던 사람처럼 그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네던 선우는 이제 담담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떨어뜨리며 힘없이 미소 지었다.'“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모든 걸 걸었다고 상대에게 모든 걸 걸라고 요구할 자격이 있는 걸까? ……처음엔 당신을 원망하고 욕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인정하게 되더군요. 그런 요구를 할 권리는 없다는 걸 말이에요. 당신이 그랬기에 내가 힘들었던 게 아니라 내가 바보처럼 모든 걸 걸어서 그런 거란 걸 알았어요.”'자조 어린 얼굴로 그때의 일을 말한 선우가 깊은 숨을 토해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옆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자신의 가방을 집어 올렸다. 발을 떼지 못하고 잠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녀가 미동 없이 앉아 있는 민준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을 떼던 그녀가 다시 입술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곤 현관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삐꺽거리는 무거운 쇳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집 안엔 민준만이 우두커니 남았다. 그녀가 가고 있다는 걸 알리는 발자국 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가로질러 그의 귓가로 들려왔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새 그 혼자만이 남아버렸다는 걸 증명하듯 방 안은 무겁고도 질식할 듯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는 멈춰진 음악을 다시 틀어 그 침묵을 잠재웠다. 선율이란 이름의 도피처가 그에게 다가와 짓눌려져 가는 그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어 오기 시작했다.'“그동안 고마웠어.”'조용히 음악의 선율에 몸을 맡기고 있던 민준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나 때문에 형이 포기한 게 많다는 거 잘 알고 있어.”'감고 있던 그의 두 눈이 일그러지며 그가 힘을 주어 어금니를 깨물었다.'“형이 행복했으면 좋겠어.”'무언가를 억누르듯 힘을 주어 참고 있던 민준이 부들거리며 손에 쥐고 있던 커피 잔을 응시했다. 그리곤 있는 힘껏 벽을 향해 거칠게 집어 던졌다. 그가 가쁜 숨을 내쉬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감당하기 힘든 감정이었다. 해석할 수도, 조절할 수도 없는 감정이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고마웠다고?’'섬뜩하도록 예리하게 빛을 내던 그의 눈동자가 알 수 없는 분노로 짙어져 갔다.'‘잘 알고 있다고?’'뚫어지게 탁자를 응시하고 있던 민준이 옆에 있는 등을 집더니 컵이 부딪쳤던 벽에 똑같이 던졌다. 등은 그 자리에 박살이 난 채, 파편으로 부서진 컵 주변에 그대로 떨어졌다.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닥치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지는 그의 손이 부서지는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편하니? 그렇게 말하고 죽으니까 편해?’'한참 동안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들을 부숴 버린 그가 숨을 헐떡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가 바닥에 엎드려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며 터져 나오지 못하고 안으로 맴도는 그런 울음소리를 냈다. 뜨거운 눈물이라도 흘러나와 준다면 좋으련만 눈물은 시원하게 흐르지 않고 그의 숨통을 죄어올 뿐이었다.'죽었다, 민우는. 동생에게 속에 있는 말을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던 그에게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 버렸다. '‘내가 너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 싶었던 건 줄 아니? 너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 싶어서 속에 있는 말을 하지 않았던 거라고 생각하니? 너를 버리고 싶어 했던 내 마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 그 말을 하고 가니까 속이 편하니?’'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밖으로 끄집어내 보려 발악하듯 울음을 터뜨려 보던 민준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곤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손으로 파괴한 물건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손으로 가슴 부근을 잡아 뜯듯이 움켜쥐었다. 미쳐 버릴 것 같은 현실에 숨이 막혔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