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르릉……! '어마어마한 천둥소리가 하늘을 뒤흔들면서 은빛 섬광이 번득였다. 그와 함께 메마른 땅 위에 무수히 많은 빗줄기들이 쏟아졌고, 사방은 삽시간에 희뿌연 안개로 뒤덮였다. '세상천지를 온통 뒤덮은 것은 비단 대자연의 변화만이 아니었다. 북대륙 유일의 제국이자 태초 이후 창룡(蒼龍)의 피를 이어받은 혈족들이 지배해온 명륜, 그곳의 황궁에서 번져 나온 흉흉한 공기와 섬뜩하기 이를 데 없는 혈향. 그것들은 삽시간에 핏빛 어둠이 되어 대지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황궁에서 흘러나온 불길한 기운의 진원지, 그곳은 다름 아닌 황후궁이었다. 파륜제의 정비인 원경 황후 예화연의 영역, 설하궁.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황후의 해산일이 한 달 남았다 하여 산실청 준비가 한참이었건만, 지금 설하궁은 전에 없이 고요한 적막으로 가득 차 있었다. 궁인들은 웃전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고, 황궁에 적을 두고 있는 황족들은 황급히 설하궁 앞으로 모여들었다.'누군가의 입에서 황후궁을 찾은 황제가 검을 들고 있었다는 말이 흘러나온 것은 황궁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제 자식을 잉태하여 해산을 앞두고 있는 황후에게 그 무슨 참담한 짓이란 말인가. 그러나 숨죽여 쉬쉬할지언정, 그들은 황제가 갑작스레 돌변한 연유를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황실의 안주인으로서 차기 옥좌의 주인을 잉태한 몸일지언정, 여인으로는 황제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던 예화연. 그리고…… 3년 전 그녀가 혼사를 약조했던 사내와 그 가문의 구족을 몰살시키고도 모자라서, 예가장의 피가 흐르는 사람들을 모조리 처형한 뒤 홀로 남은 화연을 반려로 맞아들인 황제, 진천명. '황후를 향한 황제의 집착은 실로 무시무시하다 못해 소름 끼칠 정도였다. 그는 화연을 비로 맞아들인 후에도 제 안의 광기를 늦추지 못했고, 시시때때로 설하궁을 뒤집어놓으며 그녀 주변의 사람들을 참수하기까지 했다. '그나마 황후가 태기를 보이면서 황제의 난폭한 성정 또한 조금씩 누그러들었지만…… 그 또한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몇 개월 간 잠잠했다가 갑작스레 터져 나온 파륜제의 핏빛 광기, 그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지독하기 그지없었다.'황후궁 앞에 모여 있던 황족들 중 가장 신분 높은 사내이자 황제의 아우이기도 한 성친왕, 진명환은 초조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파륜제가 설하궁에 든 것이 벌써 한 시간 전이건만, 아직 안에서는 그 어떤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미 모든 것이 끝났기에 잠잠한 것은 아닐지……. 불길한 상념을 애써 지워버린 그는 등 뒤에 부복한 황제의 무사, 어검위(御劍衛)의 위장 자윤을 향해 명했다. '“일다경만 더 기다린다. 그 이후에도 폐하께서 나오시지 않으면 즉시 어검위를 이끌고 들어가라.”'자윤이 말없이 고개를 숙이는 사이, 불안한 얼굴로 황후궁을 쳐다본 영왕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성친왕 전하, 폐하께서 드신 곳에 허락 없이 무력을 앞세우는 것은 반역에 해당하지 않습니까. 어찌 감히…….”'영왕자는 차마 더 말하지 못한 채 말끝을 흐렸지만, 성친왕은 그가 말하고자 한 바를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비에 젖은 황후궁을 한 번 쳐다본 명환은 침통한 숨결을 삼켰다. '창룡의 피를 이어받은 진씨 황가의 적자, 북대륙에서 신의 혈통이 가장 짙게 흐르는 단 한 명의 황족. 명륜의 황제가 발 딛은 곳은 곧 성역이기에, 그 어떤 자라 할지라도 감히 무기를 들 수 없는 것이 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했다. '“이 나라 대통을 이어가실 태자 전하를 품고 계신 황후 마마이시네. 행여나 폐하께서 홧김에 마마께 흉한 일이라도 하신다면 어찌한단 말인가.”'“전하…….”'“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네. 다행히 내 안곁이 며칠 내로 해산할 예정이니…… 왕부의 뒷일을 염려하지는 않아도 될 테지. 지금은 이 한 목숨보다 황실의 안위가 더 중요하네.”'자못 비장한 울림을 품은 그 말에 영왕자는 떨리는 숨결을 삼켰다. 그가 알고 있는 황제는, 같은 어미를 둔 형제라 하여 무던히 넘겨줄 위인이 아니었다. 선황제가 갑작스레 승하한 후, 태후를 빌미로 저를 얽어매려는 외가의 세력들을 단 하루 만에 멸문시킨 뒤 제위에 오른 것이 그 증거였다. '선황의 시신이 관에 들어가기도 전에 자신의 혈족들을 죽여 없앤 파륜제는 저를 낳은 어미의 눈물 어린 애원에도 결코 멈추지 않았었다. 결국 태후와 연결되어 있던 일곱 가문들의 구족까지 씨가 마른 후에야 황제는 비로소 검을 내려놓았던 것이다. '바로 그때, 황후궁 안쪽에서 숨 막히는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순간적으로 멈칫한 것도 잠시, 성친왕은 다급히 뒤를 돌아보았다.'“무엇 하느냐! 어검위는 어서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를 보위하라!”'명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윤은 어검위들을 이끌고 몸을 날렸다. 성친왕 또한 급히 설하궁 안으로 들어섰고, 황족들이 그 뒤를 따랐다.'“괜찮으십…… 화, 황후 마마!”'한발 앞서서 황후의 침소로 들이닥친 자윤의 경악 어린 외침은 황족들의 심장을 싸늘하게 얼어붙게 하기에 충분했다. 설마, 설마……! 성친왕은 반쯤 부서진 문틈을 비집고 발걸음을 내딛었다.'“……!”'삽시간에 모든 자들의 눈을 비집고 파고든 광경, 그것은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한 모습이었다. 곳곳에 날카로운 칼자국이 남아 있는 벽과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진 휘장, 곳곳에 흩뿌려진 핏자국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시릴 만큼 섬뜩했다. '흡사 광기 어린 짐승의 몸부림, 맹수의 이빨이 할퀴고 간 자리를 보는 듯한 느낌.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면 그들이 그렇듯 얼어붙지는 않아도 되었으리라. 그러나 처소 한가운데에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황후가 있었고, 그 곁에는 황제가 피 묻은 검을 든 채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허공에 못 박힌 채 꼼짝도 하지 않는 황후의 눈은 흡사 죽은 자의 것과도 같았다. 하얗게 질린 뺨, 피로 얼룩진 채 연신 파들거리는 입술, 바닥에 움푹 파인 손톱자국들은 화연의 고통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케 했다. '피로 낭자한 그녀의 배는 더 이상 잉태한 여인 특유의 동그마한 모습이 아니었다. 처참히 뜯겨나간 황후의 옷자락과 산 채로 찢겨진 피부 사이로 아무렇게나 헤집어진 속엣 것들과 양수가 흘러나온 것이 보였다. '단 한 번의 일격으로 동강나 버린 탯줄과 태반 옆에는 피범벅이 된 태아가 내팽개쳐져 있었다. 질척거리는 점막 비슷한 것에 싸여 있는 아이는, 제 아비에 의해 강제로 세상 빛 보자마자 차디찬 바닥에 무참히 던져진 참이었다.'“폐, 폐하…….”'누군가의 입에서 숨 막히는 신음 소리가 흘러나온 순간, 황제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매섭기 그지없는 살의와 분노, 그리고…… 죽여서라도 소유하고 싶을 만큼 강렬한 집착. 황후를 응시하는 그의 눈 속에 차 있는 것들의 정체는 핏빛 광기였다. '천천히, 황제는 몸을 숙여서 황후의 곁에 다가갔다. 그는 피 묻은 손을 들어 아내의 뺨을 어루만졌고, 소름 끼치도록 맑은 음성으로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