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로는 좀 부족한데…….”'제인의 보고서를 검토하던 정 팀장이 나지막이 말했다. '정 팀장의 말에 제인은 실망한 기색을 숨기기 위해 눈을 감았다 뜨며 입술에 힘을 주었다. 그러지 않으면 정 팀장의 얼굴에다 대놓고 한숨이라도 푹 내쉴 판이었다.'아무리 5월 말이라지만 눈치 없이 성급한 더위는 벌써 한여름을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그 땡볕에 나가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정리한 결과물이 불과 5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에 도루묵이 될 판이니 괜찮을 리가 없었다. '“각 사이트별 소비자 선호도 조사를 추가하도록 합시다. 포털사이트를 포함한 굵직한 사이트들을 정리해보면 답이 나올 것 같으니까.”'다행히 도루묵이 되진 않았다는 것에 감사해야하는 걸까? 하지만 말이 쉽지, 각 사이트마다 돌아다니며 디자인 소품 카테고리를 뒤적이고 자료를 긁어모아 통계를 내는 일은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일이다. 내일 퇴근 전까진 마무리해야 할 텐데……. 과연 이틀 만에 싹 정리가 되겠는가 말이다. '제인의 머릿속이 캄캄해졌다. 당장이라도 저 일밖에 모르는 팀장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면 속이라도 후련하겠단 생각을 할 때쯤, 제인의 귓가에 정 팀장의 재촉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김제인 대리.”'그제야 정신을 차린 제인이 죄인처럼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자, 자신을 쳐다보는 정 팀장과 시선이 마주쳤다.'“못 들었습니까?”'드러나게 이맛살을 찌푸리진 않았지만, 제인의 눈엔 정 팀장의 얼굴이 조금 구겨진 것처럼 보였다.'“아,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그제야 제인을 쳐다보던 정 팀장의 시선이 책상위에 널브러진 서류로 향하며 마치 다짐을 받듯 덧붙였다. '“내일 퇴근 전까지 보고서 올려요. 빠를수록 좋아요.”'“네, 그럼.”'빠를수록 좋다는 정 팀장의 말에 이를 갈듯 대답하곤 제자리로 돌아온 제인은 아까부터 꾹꾹 눌러 참았던 한숨을 책상이 꺼져라 내쉬었다. '‘뭐, 빠를수록 좋아? 당장 내일 퇴근 전까지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인데 뭐가 어째? 누가 일중독자 아니랄까 봐 정말…….’'제인은 신경질적으로 마우스를 잡으며 다시 한 번 이를 갈았다.'2년 전 처음 입사했을 땐 정 팀장과 업무를 논의할 위치가 아니었으므로 그저 능력 있는 좋은 상사라고만 생각했다. 일처리 확실하고 사내에 난잡한 소문도 없는 상사였으므로 좋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외모도 저 정도면 아직 봐줄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자신이 대리라는 직함을 단 순간부터 저 능력 있는 상사는 그저 일 중독증에 걸린 환자로밖엔 보이질 않게 되었다. 좋게 말하면 일에 있어선 완벽주의, 나쁘게 말하면 깐깐하기 그지없는 일 중독자일 뿐이었다. 이래서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고 했던가? '어쨌든 저 일 중독자 덕분에 오늘도 야근을 하게 생겼으니, 저녁에 보려고 예매해둔 영화표는 결국 물 건너 간 것이다. 제인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보려고 했던 영화를 취소하기위해 예매사이트 창을 열었다. '“아…… 정말 보고 싶었던 영환데.”'“무슨 영환데?”'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제인의 옆에서 결재서류를 들고 서있는 조 팀장의 표정이 재미있어 보였다. '“에고, 불쌍해라. 아주 그냥 어깨가 축 쳐졌네. 김 대리야, 내가 기분 좀 풀리게 해줄까?”'“네?”'“그 영화.”'수연이 턱으로 가리킨 것은 제인이 보려고 했던 영화 포스터에서 멈춰진 화면이었다.'“엄청 재미없대. 그러니까 돈 굳은 거라 생각해.”'서른세 살의 화려한 싱글은 바로 수연을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디자인 팀장이자 늘씬한 키에 능력까지 갖춘 팔방미인. 같은 부서 상사는 아니지만 대학 선후배 사이란 이유로 제인과 허물없이 지내며 조언을 구하곤 하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수연은 제인의 기운을 쏙 빼놓은 사람이 누구인지 이미 다 알고 있는 듯, 제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그래도 김 대리한테는 좋은 상사니까 조금만 참아봐. 괜히 김 대리 고생시키려고 하는 건 아닐 거야. 업무스타일이 좀 까다롭긴 해도 어긋나는 일 같은 거 지시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누구누구처럼 자질구레한 거 시키진 않잖아?”'다른 부서의 누군가를 암시하는 듯한 수연의 말에 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긴 하다. 정 팀장의 노하우나 스타일을 배워둬서 나쁠 건 없다, 적어도 일에 있어서는 말이다. 단 하나, 잦은 야근으로 인간관계가 협소해지는 것을 제외한다면…….'“네, 네네.”'여전히 조금은 비뚤어진 말투로 대답을 하는 제인이 귀엽다는 듯, 수연은 들고 있던 결재서류로 제인의 등을 툭 치고 가버렸다.'어쨌든 자신이 할 일이니 더 이상은 불평하지 말고 빨리 시작하자고 마음을 다잡은 제인은 서둘러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 * *''“정 팀장님, 퇴근 안 하세요?”'태경은 사무실의 공기가 답답해서 잠시 옥상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길이었다. 퇴근을 하려는 듯 한쪽 어깨엔 백을 메고 묻는 수연을 향해 태경이 입을 열었다.'“아직 처리할 일이 좀 남아서. 조 팀장은 퇴근?”'“그럼요. 우리 디자인팀은 청춘을 즐기기로 했거든요. 이 불타는 청춘을 야근으로 보낼 순 없죠.”'주먹까지 꽉 쥐어 보이며 말하는 수연을 보며 태경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정 팀장님도 불타는 인생을 즐겨 봐요. 세상에서 제일 자유로운 남자가 돌싱이라던데.”'“도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듣는 거야?”'“출처야 많죠. 여기저기서 주워들었으니까. 그럼 전 이만 갑니다. 내 사랑 제인 씨 너무 고생시키지 말고 일찍 일찍 퇴근시켜 줘요.”'손을 흔들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지는 수연을 보며 태경은 가만히 되뇌었다.'“내 사랑 제인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