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욕심껏 가을볕을 품은 노란 은행나무 아래에서 뿜어지는 그의 숨결은 찬 서리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화난 눈동자를 피해 결국 뒷걸음질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손에 의해 한 팔을 붙잡히고 말았다. 힘으로 끌어당겨진 채 쏟아지는 거칠고 사나운 그의 숨결 때문에 여린 낯빛은 새하얗게 질러갔다.

“네가 날, 이런 식으로 날 깜짝 놀라게 할 줄이야. 문진영 조카라고? 네가 그 대단히 잘난 운지 그룹 사장의 조카였어? 하핫!”

조롱을 담아 야멸치게 비웃던 그는 스스로를 꾸짖듯 허탈하게 웃어젖혔다. 네모반듯한 얼음 틀에서 막 튀어 나온 듯 언제 어디서나 냉정함을 잃지 않던 그다. 그랬던 그가 오늘은 가면을 잃어 버렸는지 엉망으로 일그러트린 얼굴만 보여 주었다. 그 모습이 그녀를 아프게 한다.

“무서워…… 그런 얼굴.”

“못 알아들어? 내가, 네, 삼촌을 만났다고. 더 듣고 싶어?”

삼촌을 만났다고? 놀란 라희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삼촌의 표정 또한 눈앞에 있는 이 남자와 비슷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젯밤 삼촌의 모습도 지금 이 남자처럼 그녀가 평소 알던 삼촌의 모습이 아니었다. 지금껏 라희는 삼촌이 살인을 저질러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무섭고 잔인한 표정을 짓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슬프게도 삼촌을 그토록 화나게 한 사람은, 원치 않게도 서진이었다. 어젯밤 내내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던 삼촌이 오늘 서진을 만났다고 한다. 분명 상냥하진 않았을 것이다. 흐지부지한 건 뭐든 못 참는 삼촌의 성격은 불을 닮아 있었다. 삼촌이라면 서진을 회복불능 상태가 될 때까지 철저하게 짓밟아 놓고도 남았다. 더 나아가 지독한 말들로 서진의 자존심을 후벼 파내 완벽하게 상처 받게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미, 미안해. 오빠와 나의 문제에 삼촌이 끼어들게 해서 정말 미안해.”

“그만! 너도 네 삼촌도 내 눈앞에서 당장 꺼져.”

벌레 털어내듯 그때까지 잡혀 있던 그녀의 팔이 자유로워졌다.

“서진 오빠…….”

사랑은 그녀가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한 것도 그녀가 먼저였다. 그런데 왜, 그녀가 아닌 삼촌과 서진이 더 큰 상처를 받은 것처럼 괴로워하는지 모르겠다.

“하필, 너라니. 하필이면 왜 너야? 왜 너냐고!”

절절한 그의 고함이 밤하늘을 뒤덮었다. 손에 잡히는 건 뭐든 부숴 버릴 것처럼 움켜쥔 주먹이 그를 대신해 우는 듯하다.

“널 만난 게, 널 내 삶에 들여 놓은 게,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야.”

마음의 정리를 끝낸 듯 말을 마친 그의 눈이 부서지듯 감겼다.

“서진 오빠…….”

희미한 그녀의 부름에 악만 남은 그의 눈이 예고 없이 떠졌다. 그 눈을 마주하기 버거웠던 라희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

“지금 내 심정을 말해 줄까? 너를 알지 못했던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기꺼이 어떤 대가든 치를 생각이야.”

“그러지 마. 오빠는 돈의 유무로 사람을 판단하는 하는 사람이 아니잖아. 차라리 우리 삼촌이 나빴다고 말해줘. 우리 삼촌의 부유함이나 회사와는 상관없이, 삼촌 때문에 화가 났다고 말해.”

“문라희 잘 들어.”

키스를 할 듯 그녀의 얼굴 앞으로 바짝 다가온 그의 얼굴이 순간 비참하게 구겨졌다. 라희의 눈을 찌를 듯 매섭게 들여다보던 그가 절망으로 일그러진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 상태로 그는 그 자신이 뱉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호흡으로 그들의 관계에 대해 명확하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너는 더 이상, 내 전부가 아니다. 문라희. 이래도 못 알아들어?”

라희는 숨이 턱 막혔다. 물기 젖은 그녀의 얼굴이 빛을 잃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서진 오빠. 나는, 나란 아이는. 늘 놀기만 좋아하고 덤벙대서 혼나 놓고도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 오빠를 참 많이 힘들게 했어. 지금도 서진 오빠가 더 무섭게 굴어도 좋으니까 내 변명에 또 속아 넘어가 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어. 그런데 오빠 얼굴 보니까…… 이젠 안 되는 거지?”

이제는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라희는 용기를 끌어 모아 고개를 들어 올렸다. 좀 더 용기를 내서 고통스럽게 구겨져 있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마서진은 한 번 안 된다고 정하면 그대로 직진만 하는 남자였다. 그런 그가 너는 아니라고 했다. 아마도 그의 말대로 될 것이다. 그런데 라희는 심각한 상황임에도 웃음이 나려 했다. 앞으로도 절대 저 마음이 변할 리 없는 냉정하고 명확하기 짝이 없는 저 남자가 이런 상황에서도 멋져 보인다니. 이건 병이다.

“알았어. 우린, 헤어진 거야, 지금. 대신,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내 말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조금 줄래?”

스스로 이별을 선고한 라희는 화끈거리는 통증과 함께 차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삼켰다. 지금은 울 때가 아니었다.

“운지그룹 조카께서 황송하게도 부모도 없이 사는 가난한 대학생한테 시간을 내달라고 부탁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