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평 남짓한 사무실에는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나른한 공기가 주변을 감싼 것과 달리, 남자의 눈빛은 사냥을 앞둔 맹수처럼 날카롭게 반짝거렸다. 의자가 소리를 내며 도는 것과 동시에 힘을 주었는지 기분 나쁜 소리가 새어나왔다. 움직임 없이 앉아 있던 남자의 손에서 빨간 불꽃이 피어오르며 회색의 담배 연기가 남자의 입에서 후우 소리를 내며 뿜어져 나왔다. 드디어 내일이었다. 지금 하려는 일이 과연 가슴에 얹힌 체증을 풀어줄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솔직히 풀리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자그마치 13년을 가슴속에 품어온 복수였고 모든 것이 자신의 계획대로 이루어진 상태였다. 이뤘다는 성취감보다 더한 것은 점점 냉정해지고 있는 마음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지금 자신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과거를 지우려 했지만, 이미 생각은 13년 그 무더웠던 여름날로 돌아가고 있었다.''이른 새벽, 어둠이 가시지 않은 회색빛 하늘에 붉은 기운이 뻗어나오며 시골 농부들의 단잠을 서서히 깨우기 시작했다. 요란스럽게 움직이는 경운기 소리부터 시작해 서로를 부르는 것이 농부들의 손길이 유난히 바빠 보였다. 산을 넘어 읍내에 있는 학교로 향하는 학생들의 평균 등교 시간이 되려면 한 시간이나 더 있어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하씨 댁 승우는 등교를 서두르고 있었다.'“오늘도 일찍 서두르는구나.”'“네. 아무래도 걸어가야 하니까요.”'살림 형편이 어려워 교통비를 아낄 생각으로 승우는 궂은 날씨에 상관없이 언제나 걸어다녔다. 그런 승우가 어른들의 눈에는 대견스러워 자기 자식들과 종종 비교하곤 했다. 왜 양쪽 부모가 다 있고 부족함 없는 자신의 자식과 승우가 그렇게 차이가 나는지 은근히 부러워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못마땅해하는 이들도 있지만 어느 누구에게나 똑같은 부러움이 내재되어 있었다. 승우는 못 먹는 집 아이 같지 않게 키도 컸고, 공부는 왜 그렇게 잘하는지……. 전국에서 10위권 안에 드는 성적을 유지하고 있어 동네의 큰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조심해서 다녀라. 날씨 때문인지 부쩍 뱀이 많이 보이더라.”'“네.”'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어른들이 보이지 않자 습관처럼 주머니 안에 넣어두었던 단어장을 꺼내들었다. 남들보다 다소 이른 아침의 시작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지금은 힘들지만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면 절로 입가에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자신에게는 공부 외의 다른 생각은 모든 것이 사치였다. 중간쯤 다다랐을까, 평소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길이 아니었기에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여자를 보고 승우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 물러서고 말았다. 지금 같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미물을 생각할 정도로 얼마나 놀랐는지……. 하지만 놀란 자신과 달리 여자는 태연했고 은근히 웃는 여유로움까지 보였다. '“놀랐나 보네.”'약간의 코맹맹한 소리와 함께 여자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커지고 있었지만 승우에게는 그것을 알아차릴 여유가 없었다. 처음 본 화려함과 여자에게서 풍기는 진한 향수 내음에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같은 반에 여자들이 있었지만 지금 앞에 있는 여자처럼 투명하고 깨끗한 피부를 본 적이 없었다. 상대방 역시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얼마나 그렇게 서로를 탐색했을까. 화려한 옷차림, 진한 화장, 포장되지 않은 도로에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구두까지,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는 자신의 눈길에 여자는 피식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자신에 대한 탐색전이 어느 정도 끝났는지 살짝 앞으로 다가왔다. '“학생, 황민국 씨 집으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지?”'“네? 네.”'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정신을 차리고 승우는 위치를 가르쳐주었다. 열심히 설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대답이 없어 고개를 치켜들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내려보고 있었다.'“자세히 들으셨죠? 일단 이 고개만 넘으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예요.”'“그래? 아휴, 그런데 아침치고 너무 덥다. 학생은 안 그래?”'“아니요. 저는 그럼 학교에 가봐야 해서…….”'옆을 살짝 스쳐 지나가려 했는데 어느새 여자의 손이 자신의 어깨에 놓였다. 순간적인 반사 작용으로 휙 고개를 돌리자 유혹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저…… 저어.”'“어머, 학생 순진하다. 잠깐 어깨에 뭐가 묻어서.”'꼼짝할 수 없었다. 피 끓는 고3 남자에게 난생처음 닿은 여자의 손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살짝 밀어내고 앞으로 걸어가려는데 여자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더니 품안으로 안겨들었다. '“배…… 뱀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