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서는 대학입시 때문에 지금 서울에 와 있었다. 오늘은 지원한 대학에서 면접이 있었다. 지원한 세인대학을 친구 태수와 함께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야아. 준서야?”'“응?”'“너 면접 잘 봤니? 난 덜덜 떨면서 말했는데. 어찌될지.”'“이제 우리는 최선을 다했어. 이제 끝난 입시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자.”'준서는 학교 잔디밭에 주저앉아 말했다. 겨울이라 잔디도 거의 죽어 노란색 지푸라기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태수도 준서 옆에 주저앉으며 말했다.'“서울은 춥긴 춥구나. 바람이 안 불어서 몸만 추위에 잘 방어하면 될 줄 알았더니. 야아, 춥다. 여긴 학교 내라고 해도 방학이라 그런지 학생들도 없는 것 같지 않냐?”'“모르긴 해도 여기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너랑 나처럼 면접 보러 온 고딩들이 더 많을걸?”'“그런가? 야, 인마 면접도 끝나고 마음이 싱숭생숭한 것 같은데, 여기 학교 앞에 가서 술이나 한잔하자.”'“그럴까?”'학교 교정의 건물 사이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 바람은 골바람처럼 마치 기압 차이가 있는 것처럼 아주 세찬 바람이었다. 찬바람이 얼굴을 스치자 준서는 목에 여민 목도리를 더 칭칭 감고는 태수와 함께 학교 앞 선술집으로 갔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그나마 사람들의 열기와 난방 덕에 조금은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야아, 여기는 따뜻하네. 밖에 엄청 춥던데. 무슨 바람이 저렇게 부냐? 난 서울은 부산만큼 바람이 안 불 줄 알았는데. 바람이 부니 부산보다 더 춥네.”'“당연하지. 위도상 여기가 훨씬 위잖아. 부산은 눈도 잘 안 오는걸.”'“에에. 그래도 난 부산 겨울도 춥더라. 뭐, 바닷바람이 장난 아니잖아. 그것 때문에 더 체감온도도 떨어지고.”'“그건 그래. 뭐 마실래?”'“우리 찐하게 이슬이나 하나 빨까?”'그들은 진로 2병과 안주로 따뜻한 알탕을 시켰다. 그러자 진로 2병과 몇 가지 곁들인 음식이 나왔다. 금방 나온 계란탕에 둘은 눈이 갔다. 사실 바깥에 오래 있어 추위를 많이 느낀 터라 김을 솔솔 풍기며 나온 계란탕은 정말 군침이 돌 정도로 맛있어 보였다.'일단 서로 한잔씩 주거니 받거니 잔에 따르고는 잔을 들고 서로 마주 보았다.'“우리 건배하자!”'“무얼 위해서 하지?”'“그야, 너와 나의 빛나는 청춘을 위해서?”'둘은 나지막하게 웃으며 별 말없이 그저 술을 즐겼다. 남자들끼리 앉아서 술을 마시다 보면 별로 할 이야기도 없는 것 같다. 더욱이 태수와는 같은 고등학교이고 학교에서 거의 매일 보는 사이라 더 그랬다.'그렇게 대충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낸 준서와 태수는 가게 밖을 나왔다.'“이젠 너 이모 집으로 갈 거냐?”'“응. 너무 늦게 다니게 하지 말라고 우리 어머니가 이모한테 당부했어. 더 늦으면 이모 눈치 보여.”'“그래? 너희 이모 집은 봉천동 방향이지?”'“응. 나도 가봐야겠다.”'태수와 헤어져 봉천동으로 가는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라 지하철역엔 사람이 많이 없었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봉천역에서 내린 준서는 낮은 고바우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던 중 이상한 소리가 들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골목길에서 2, 3명의 양아치가 어린 소녀를 잡고는 삥 뜯으며 협박하고 있었다.'“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사람 살려!”'그 양아치들은 주먹을 쥐고는 소녀의 얼굴로 가까이 가져다대며 말했다.'“또 떠들어 봐! 죽는당. 그리고 가진 것 있으면 다 꺼내 봐! 어서.”'소녀는 조그마한 소리로 두 손을 싹싹 빌면서 이야기 했다.'“저……, 정말. 어, 없어요. 그, 그 지갑에 든 게 다예요.”'“체엣, 너 정말 돈 없어? 뒤져서 나오면 10원당 한 대씩 맞는다.”'“야아. 뒤져 봐. 돈이 정말 없냐?”'“진, 진짜 없다니까요.”'“확, 이게 어디서 말대꾸야!”'“야야. 저거. 야들야들하게 생겼는데, 돈이 없다면……. 흐흐흐, 옷이라도 벗기자.”'둘은 소녀를 때리려고 하고 하나는 소녀의 옷을 벗기려 하고 있었다.'“야. 너희들은 망을 봐.”'그때였다. 밝은 가로등이 켜져 있는 이면도로에서 그네들이 있는 골목길로 누군가가 뛰어들면서 말했다.'“잠깐! 체엣, 어디서 동네 똥파리들이 설치냐? 아직 여름도 아닌데.”'준서가 뱉는 말에 양아치들은 준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남자 한 명이 자기네들한테 떠드는 소릴 듣더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는지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그 틈을 타 소녀는 깡패들 손아귀에서 벗어나 한쪽 구석으로 비켜 서 있었다.'“쳇, 저건 또 뭐냐? 잘됐다. 우리한테 용돈 좀 줄 테냐?”'“뭣이, 어이 꼬마. 어서 도망가.”'준서는 가련해 보이는 소녀를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소녀는 준서 뒤로 빠져나와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준서는 어릴 때부터 경찰관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태권도와 합기도, 검도 등 못하는 운동이 없었다. 남자는 소중한 여자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며 어릴 때부터 단련을 시키며 도장까지 보냈던 것이다. 가끔 준서는 이럴 때가 되면 그런 아버지께 감사하게 생각했다.'“야, 저놈 잡아. 저거 겉에 입은 파카 보니까, 돈 좀 있을 것 같다.”'투탁투탁 휘익.'그들이 손을 뻗자 그 손을 잡고는 오른쪽 다리로 돌려차기로 한 명을 쓰러뜨린 후 다른 한 명은 왼쪽 주먹으로 얼굴을 내리쳤더니 두 명이 바닥에 쓰러졌다. 3:1의 싸움이 시작되었으나 이미 승산은 준서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그중에 서 있던 한 명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말했다.'“야아, 더, 덤벼.”'허풍을 부리며 힘없는 소리로 주먹을 허공에 내지르며 소리쳤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그들은 준서의 눈치를 살피고는 슬그머니 일어서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 꼴을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던 준서가 말했다.'“야아, 너도 살려 줄 때 빨리 돌아가라.”'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꽁지를 빼면서 도망을 갔다. 사태가 진정되어서야 준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어쩔 줄 모르고 가만히 서 있던 소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 소녀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얼굴의 눈두덩은 이미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고 왼쪽 입술 옆엔 멍이 시퍼렇게 들어 있었으며 옷도 군데군데 찢어져 외투는 거의 반쯤 벗겨진 채였으며 안에 입은 남방도 단추가 떨어져 나가 버렸는지 옷이 벌어져 브래지어가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소녀 앞으로 다가가 손을 뻗자 소녀는 두려운지 어깨를 움찔거리며 몸 전체를 움츠리기 시작했다.'“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는지 보려고 그러는 거야.”'나지막한 소리로 소녀를 달랜 후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소녀의 얼굴을 닦아 주면서 손을 이리저리 놀려 소녀의 옷을 바로 정리해 주었다. 하지만 몇 개 없어진 단추 때문에 옷이 완전히 여며지지 못하고 조금 벌어지자 준서는 자기 목에 매져 있던 목도리를 풀어 소녀의 목에 매어 속옷이 보이지 않게 해주었다.'“꼬맹아,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뭐하느라고 돌아다니다 이런 일을 당했니? 위험하게 밤늦게까지 돌아다니다니.”'준서의 나무라는 듯이 한 소리를 하자 소녀는 화가 났는지 한마디 쏘아붙였다.'“도와주신 것은 고마워요. 평소엔 이 시간에 다니진 않아요. 엄마 병원에 있다가……. 그리고 여기, 오랫동안 제가 다녀 봤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그리고 저 꼬맹이 아니에요.”'“하하하 꼬맹이라 해서 화났구나? 하지만, 아무리 봐도 넌 초등학생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