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애 응애!”'오래도록 어린아이의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던 DS그룹 회장 본가에 실로 오랜만에 아기 울음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졌다. '“공주님입니다.”'숙련된 솜씨로 아이를 받아 내던 조산사가 말했다.'“정말, 정말 딸이에요?”'그것이 열세 시간의 힘겨운 산고 끝에 아이를 낳은 산모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이었다.'“네, 축하드립니다. 정말 예쁜 공주님이시네요. 금방 안아 보시게 해드릴게요.”'하지만 산모는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가에는 세상 그 무엇보다 뜨거운 모정이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DS그룹 안팎의 수많은 촉각이 오늘의 출산에 맞춰져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DS그룹은 정치, 경제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안이었고, 오늘 태어난 아이는 그 모든 권력을 가장 먼저 물려받게 될 DS그룹 남 회장의 첫 손자였다. 아이는 아들인지 딸인지를 떠나서 태어나면서부터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간의 엄청난 관심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이 아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중요한 사람에게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권리는 이미 잃은 상태였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7개월이 되던 달에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이의 어머니가 남편을 잃고도 이 대단한 집안의 며느리로 떳떳하게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뱃속의 아이 덕분이었다. 아이가 사내아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DS그룹을 물려받을 정통 후계자가 되어 어린 나이부터 지도자 교육을 받으며 자라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는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대로 아들이 아니었다. DS그룹 회장의 첫 손자이지만 아버지 없이 태어나 자신의 일 년 앞 미래를 예측하는 것조차 불안한 불쌍하디 불쌍한 계집아이일 뿐이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앞으로 아이에게 닥칠 시련을 예상하는 것만으로도 끊임없이 눈가가 젖어들었다.'아이의 이름은 승현이라 지어졌다. 승현은 유난히 하얀 피부에 새까만 눈동자와 머리카락을 지닌 인형처럼 사랑스러운 아이였지만 고작 생후 5개월이 되었을 때 작은아버지의 아들 승우가 태어남으로서 자연스럽게 세간의 관심에서 묻히기 시작했다. 반면 승우는 차남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남 회장 곁에 유일하게 남겨진 아들이자, 회사에서 상무 직책을 맡고 있는 아버지를 두었기에 누가 보기에도 DS그룹의 후계자 자리를 물려받기에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때부터 일가친척들은 물론이고 본가에서 소소한 일손을 돕고 있는 이들까지 승현과 그녀의 어머니를 볼 때면 뒤에서 안쓰러움에 혀를 찼고, 남편과 사별이라도 한 여인은 이유 없이 흐르는 눈물을 옷소매로 닦아냈다. '어린 승현과 승우는 본가에서 함께 자랐다. 승현의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그녀의 부모님이 통째로 사용했던 2층은 이제 승우와 그의 부모가 쓰게 되었고, 승현과 어머니는 손님 접대용으로만 사용되던 1층의 방을 다시 꾸며 사용하게 되었지만 승현의 어머니는 누가 뭐래도 남편의 지분을 물려받은 DS그룹의 핵심 주주였으며 회장의 첫째 며느리로 당당했다. 물론 그녀 역시 평범한 집안의 여식은 아니었다. 정계에서의 위치가 DS그룹과 어깨를 견줄 집안은 아니었지만 학식과 덕망이 높기로 유명한 집안의 자손이었으며 빼어난 외모까지 겸비해 도자기처럼 곱디곱게만 자라났다. 그런 그녀에게 승현의 아버지가 첫눈에 반해 집안에 청혼을 넣어 결혼을 한 것이었다. '어린 승현은 제 어머니의 미모를 빼닮아 자라날수록 더할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운 외모를 지니게 되었다. 결혼을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탐낼 만큼 사랑스럽고 예쁜 아이였지만 그녀의 어머니만은 승현을 바라보는 매순간의 눈길에 걱정이 가득했다. 우직한 사내아이도 아버지 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는 것이 힘든 이 집안에서 너무나 가녀리고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승현이 언제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버텨낼 수 있을지 하루도 걱정이 잦아드는 날이 없었다. '승현의 어머니가 그런 걱정을 하는 데는 유달리 재물 욕이 강하고 이기적인 성격을 지닌 작은아버지 부부가 크게 한몫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승현의 어머니에게 동서가 되는 승우의 어머니는 미인대회 본선에 진출해 잠시 연예 활동을 하다 운 좋게 승우 아버지의 관심을 사 대기업의 며느리가 된 것으로 세간에는 잘못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DS그룹에 자제를 납품했던 중소기업 사장의 장녀로 처음에는 승현의 아버지와 혼담이 오고갔던 사이었다. 그런데 승현 아버지의 완강한 거절로 일이 틀어져 승우 아버지와 연을 맺게 된 사이였으니 지금껏 승우 어머니에게 형님이란 존재는 자신의 것을 가로채간 시기와 질투, 그리고 복수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승우 아버지 역시 늘 형님에게 모든 것을 양보해야 했던 음지 같은 차남의 삶에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바뀌고 나니 그것들을 다시 누군가에게 빼앗기기 되는 상황을 일찌감치 차단하고자 승현 모녀를 필요 이상으로 경계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집 안에 어린 승현의 웃음소리가 울리는 것에조차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고, 남 회장이 없는 자리에서는 승현 모녀에게 노골적으로 살 집을 알아봐 스스로 나가는 것이 어떻겠냐는 본심을 내보이기도 했다. 그러니 승현은 날이 갈수록 조용하고 내성적인 아이가 되어갔고, 생각이 커갈수록 어머니와 함께 본가를 떠나고 싶어 했다.'가정부조차 승현과 승우의 밥상을 차별하는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두 아이를 차별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그들의 할아버지인 남 회장뿐이었다. DS그룹이라는 거대 그룹의 회장으로 항상 바쁜 나날을 보내는 남 회장이었지만 그는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승현의 방에 찾아와 책을 읽어 주기도 했고, 승현이 이토록 예쁘게 잘 자라나는 모습을 아버지가 봤다면 분명 자랑스러워했을 거라고도 말해 주었다. 승현은 그런 할아버지에게 사랑과 존경 이상의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할아버지 앞에서 속내를 꺼내 보인 적은 없었다. 자신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할아버지가 이미 알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할아버지가 자신의 방에 들렀다 가는 날에는 평상시보다 훨씬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있었고, 가끔은 꿈속에서 할아버지를 닮은 아버지를 만나기도 했다. '자라날수록 건방지고 제멋대로인 승우와는 달리 승현은 몸가짐이 바르고 얌전하며 매사에 자신이 맡은 일을 똑 부러지게 처리하는, 단지 아이 답지 않게 너무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을 지녔지만 그마저도 행동이 산만한 승우와는 극명하게 대조가 되어 오히려 칭찬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작은아버지 부부의 시샘은 날로 커져갔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할아버지와 제 어머니가 없는 자리에서는 어린 조카를 무시하고 가정부처럼 부리기도 했고, 가끔은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 취급을 하며 소외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승현은 그런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자신으로 인해서 어머니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고, 할아버지에게 심성이 나약하고 고자질이나 일삼는 한심한 아이로 비춰지는 것이 싫어 이를 악물고 모든 수모와 서러움을 견뎌냈다. 그렇게 어리고 조그만 계집아이는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에게 독종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잘 견뎌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지독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단지 본능적으로 그것을 숨겨야 한다는 사실을 터득한 것뿐이었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12살이 되었을 때 승현은 오랜 시간 어머니와 할아버지를 설득한 끝에 홀로 미국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자신만을 바라보는 어머니를 홀로 두고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머니 역시 그녀가 집안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하며 자라는 것보다 유학으로 더 많은 경험과 학식을 갖추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에 그녀를 격려해 주셨다. 다행히 미국에는 이모 내외분이 살고 있던 터라 어머니의 염려가 조금은 준 듯했다. 그렇게 승현은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언제 돌아오겠다는 기약도 없이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그로부터 정확히 10년이 지난 어느 날 빨리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전보 한 통이 그녀에게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