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연애할까?”'“풋!”'자판기 커피를 홀짝이던 순진은 창우의 이 말 한마디에 실소를 터트렸다.'“그런 멘트 이젠 물릴 때도 되지 않았니?”'“그런가?”'순진의 대꾸에 그가 빙그레 웃었다. 창우는 가끔 이런 실없는 농담으로 그녀의 울적해진 기분을 달래주곤 한다. 늘 외로움에 파묻혀 사는 순진에게 창우는 유일한 친구이자 말벗이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한걸.’'한겨울의 스산한 바람이 그녀의 허전한 목둘레를 시리게 훑고 지나갔다.'‘아침에 스카프라도 두르고 나올 걸.’'외투마저 낡은 탓에 순진은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바람이 제법 찬 것 같아.”'“12월이니까.”'그녀를 따라 공원 벤치에서 일어서던 창우는 빈 종이컵 두 개를 잊지 않고 챙겨 들었다.'“쓰레기는 휴지통에. 자연을 아끼고 사랑해야지.”'“네게 자연까지 사랑할 여유가 남아 있다면 나도 좀 아끼고 사랑해 주면 안 될까?”'“하하하!”'농담 반, 진담 반이 섞인 순진의 대꾸에 창우는 시원스런 너털웃음을 날렸다. 매서운 저녁 바람 사이로 그의 짧은 머리카락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구김살 하나 없는 창우의 쾌활한 웃음소리가 괜스레 서글퍼진 그녀의 감정들 사이로 살포시 스며들었다. '“갈게.”'승용차에 오른 그는 미련 없이 다른 차량들 사이로 꼬리를 감추었다. ''3층 다세대 주택의 맨 꼭대기 옥탑방에서 순진은 세 들어 살고 있었다. '낡은 열쇠 구멍을 맞추고 삐걱거리는 현관문을 열자 보일러를 틀지 않은 방 안 공기가 온통 썰렁하게 느껴졌다. '딸깍.'단칸방의 전등 스위치를 올리자 아침에 그녀가 어질러 놓은 옷가지들이 좁은 방 안을 어수선하게 뒹굴고 있었다.'보일러의 전원을 켠 순진은 단단하게 잠가 놓았던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휘황찬란한 저녁 불빛들이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어지럽게 휘젓고 있었다. 전혀 캄캄하게 느껴지지 않는 화려한 밤 풍경의 광경을 그녀는 잠시 동안 멀거니 바라보고 서 있었다.'‘행복하자. 예순진. 사랑한다. 예순진. 넌 견뎌낼 수 있다. 예순진.’'딱딱한 방바닥 위에 이부자리를 편 그녀는 오늘 밤도 주문처럼 이 말을 혼자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깔았다.''다음 날 아침, 순진은 어김없이 기상 시간을 놓치지 않고 이부자리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에서 깬 그녀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시원스레 기지개를 켠 후 방 안 창문을 빠끔히 열어보는 것이다.'밤사이 차가운 겨울바람을 고스란히 맞은 창문이 그녀의 다섯 손가락 끝에 얼음처럼 달라붙었다. 입 안에서 새어 나오는 하얀 입김을 순진은 장난스런 표정으로 호호 불었다.'따뜻한 보리차 한 잔으로 아침 식사를 대신한 그녀는 바삐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굿모닝!”'오늘도 변함없이 가장 먼저 출근한 막내 혜정이가 볼링장 안으로 들어서는 순진을 향해 빙긋이 웃어 보였다.'“순진 언니, 제가 오늘 김밥 싸왔어요.”'올해 스물 한 살인 혜정은 풋풋한 나이에 걸맞게 행동과 말투가 무척 애교스럽기 그지없었다.'2층 탈의실로 올라간 그녀는 두터운 외투와 겉옷을 얌전히 옷걸이에 걸어 두었다. 무심코 시선이 잡힌 전신 거울 안에서 달랑 속옷 두 장만을 걸친 순진의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S라인 몸매 정도까지는 되지 않더라도 풍만한 젖가슴과 잘록한 허리를 받쳐 주는 늘씬한 각선미에 그녀는 옅은 만족감을 느끼며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웬 김밥이야?”'“오늘 남동생이 학교에서 현장 학습을 갔거든요.”'“잘 먹을게.”'혜정과 나란히 프런트에 앉은 순진이 김밥을 먹고 있을 때 출입문을 밀치며 정화가 바삐 들어섰다.'“언니, 지각 아니지?”'“정확히 8시 58분이야.”'벽에 부착된 디지털시계를 힐끗거리며 그녀가 말했다.'“후유! 다행이다. '곧 있으면 주부 회원들이 하나 둘씩 볼링을 치러 오기 때문에 순진은 컴퓨터를 켠 후 빌지를 체크했다.'“순진 씨, 3번 레인으로 부탁해.”'오늘의 첫 손님은 닭갈비 가게 주인인 백효숙 아주머니였다.'“오늘은 아저씨하고 같이 안 오셨어요?”'“그 양반 몸살 났어.”'툭하면 감기를 달고 사는 남편에 비해 백효숙 아주머니는 에너지가 충만하다 못해 철철 넘쳐흐르고 있었다. 자정이 넘도록 식당 일을 하다보면 물에 젖은 솜처럼 몸이 축축 처질만도 하건만 그녀는 하루도 빠짐없이 볼링을 치러 오는 단골 고객들 중 한 명이었다.'어느새 1층 레인은 볼링을 치러 온 주부 회원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순진 씨, 모닝커피 한 잔 어때?”'구내에 설치된 자판기 관리를 하고 있는 박정민 부장이 그녀 앞으로 따끈한 종이컵 한 개를 내밀었다.'“잘 마실게요.”'훤칠한 키에 웬만한 영화배우 뺨 칠 정도의 외모를 지닌 그는 매너 또한 끝내주게 좋은 남자였다. 6년 전, 이 빌딩의 주인이자 볼링장 사장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전체적인 영업을 총괄, 담당하고 있었다.'“부장님, 제 커피는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