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을 지나면서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 현관문 앞에 설 때까지도 알 수가 없었다. 문손잡이를 잡고 문을 잡아 열 때에야, 그렇군 하고 수강은 뒤를 돌아보았다.'텅 빈 정원. 개들이 안 보인다. 한조를 끔찍하게 따르는 세 마리의 개들이 오늘은 어디 숨었는지 나타나지 않았다. 보통 수강이 들어오면 그들은 주인의 친구를 알아보고 나와서 환영의 인사를 하기 마련이었다. 한조가 후원에 있는 걸까 하고 의아해하며 수강은 안으로 들어갔다.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어, 나다. 집에 왔는데 너 어디냐?”'“아, 커피 내리고 있어.”'“집 안이야?”'“그런데?”'수강이 의아함을 담아 묻자, 한조도 말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수강은 전화를 끊고 어슬렁어슬렁 복도를 지나 주방으로 향했다.'한조는 과연 주방 커피 메이커 앞에 있었다. 수강을 보고는 인사 대신 손을 들면서 그가 물었다.'“너도 한 잔 마실래?”'“준다면야.”'수강이 빠르게 한조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대답했다. 한조는 운동 후 샤워까지 마친 뒤인지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검은 면바지에 흰 셔츠는 앞섶이 풀려 있다. 그 사이로 깨끗하게 감은 붕대도 보였다. '붕대라? 병원에 다녀왔을까? 또 하나의 궁금증과 함께 수강은 물었다.'“멀쩡해 보이네?”'“그러면 안 되냐? 뭘 기대한 거야?”'한조는 머그컵 세 개를 내려놓았다. '세 개. 그 숫자에도 수강은 호기심을 느꼈다. 하나는 한조, 하나는 수강,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유의 몫? 그러니까 한조가 지금 사유를 위해 커피를 준비 중이었다는 이야기? 헛, 수강은 뱃속이 간질거리기 시작했다.'“아니 난 잠이나 잤을까 싶어서. 어제 그제 비가 좀 왔냐? 천둥도 요란했고. 거기다 병원도 안 갔으니 수면제 떨어졌을 테고. 장 선생님이 너 왜 안 오냐고 나한테 연락했는데. 아냐?”'지난 몇 년간 불면증과 우울증-이건 죽어도 한조가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를 지켜본 수강이 읊어준 상황 묘사만으로도 증세는 확실했다-때문에 고생하면서도 한조는 병원에 가는 걸 극도로 꺼렸다. 결국 인태의 애원에 가까운 권유로 인해 정신과에 가서 처방을 받았고, 한조가 잠을 자기 위한 약으로 생각하고 받았던 약들은 사실 우울증 치료의 목적도 있었다. 극적인 상황 호전은 없었지만, 현상 유지 정도는 무난하게 해왔다. 한조는 단순히 약을 타러 가는 정도로 생각하고, 수강은 따로 남아서 한조의 상황에 대해서 의사와 상담을 주고받는 기이한 형태로. 수강이 상담을 하는 이유를 한조는 수강이 섹스 중독을 치료하고자 한다고 둘러댄 그대로 믿는 눈치다. 그런 말이 먹히다니 신용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잘 잤어.”'대답하던 한조가 무얼 떠올렸는지 미소하는 걸 수강은 놓치지 않았다. 지능보다 더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눈치 세포가 그 미소가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라고 콕콕 알려왔다.'“마누라랑 안 싸우고?”'“뭐 그리 궁금한 게 많아?”'커피를 다 따르고 머그컵 하나를 퉁명스레 수강에게 내밀며 한조가 눈살을 찌푸렸다. 받아들면서 수강은 너스레를 떨었다.'“난 또, 날 잡고 마누라를 패나 했지. 거치적거릴까 봐 나 못 오게 한 거 아니었나?”'기껏 비가 많이 오는 날이라 어제 오전 댓바람부터 놀아 주려고 왔더니 대문 앞에서 건 전화에 내일 보자 소리를 해서 그대로 돌아가야 했었다. 기분도 꿀꿀한데 카지노나 가자고 적극적으로 꼬여 보았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아주 드문 일이었다.'한조가 컵 두 개를 들고 주방을 나가는 것을 따라가면서 수강은 물었다.'“개들 안 보이던데. 비 온다고 어디 딴 데 들여놓고 잊어버린 거 아니야?”'물론 한조가 개에 관한 일을 잊어버리거나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떠보듯이 건넨 질문에 돌아온 대답이 너무 쇼킹했다.'“다른 곳에 보냈어.”'“뭐? 왜? 아 동물병원? 세 마리가 다 아파?”'“농장에 전화해서 데려가라고 했어. 어제 오후에 데려갔고.”'“어…… 왜?”'농장이라면 한조 명의로 나주에 하나 있다. 몇 만 평쯤 되는 땅을 소작을 주어 관리하고 있는데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대신 한조와 인태의 앞으로 이런저런 푸성귀며 곡식, 과일을 꼬박꼬박 부쳐 준다. 가축도 상당수 치면서 개들도 꽤 많이 키운다. 지금 개들도 농장에서 키우는 개들 중에서 적당히 자란 걸 데려온 거였다.'“왜 돌려보냈어? 아직 다들 건강해 보였는데. 설사 보냈다 해도 대신할 놈들은 데려와야 할 거 아냐?”'“필요 없어. 안 키워, 이제.”'“어? 왜?”'생각도 못한 말에, 수강은 전혀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기분으로 멍청하게 반문했다. 한조는 상냥하게 이유를 설명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한조가 이윽고 응접실 앞에 멈추어 문을 열었다. 수강은 안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를 들었다. 안으로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돌아본 피아노 앞에 사유가 있었다. 들어온 두 사람 쪽으로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악보를 보며 쇼팽의 ‘녹턴’을 연습하고 있었다. 다시 보아도 낯설기 짝이 없는 그녀의 검은 머리에 수강은 머리를 저으며 한조에게 슬쩍 말했다.'“난 저 머리 보면 네가 자는 사이에 들어가서 잘라 버리지 않을까 했는데.”'한조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소파로 걸어가 한조는 다리를 올리고 길게 앉았다. 수강이 그 맞은편에 앉으려고 했더니 대번에 쏘아보는 바람에 옆으로 비켜 앉았다. 옆을 돌아보고 그 이유를 알았다. 한조가 사유를 감상하는 데 방해를 할 뻔한 것이다.'사유는 가끔 실수를 했다. 처음 시도하는 곡이라 애를 먹고 있는 듯했다. 질리지도 않고 매끄럽게 연주할 때까지 같은 부분을 수없이 반복했다.'한조는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테이블에 올려놓은 사유 몫의 커피를 보았다. 김이 약해졌다. 거의 식어 버렸을 터였다.'“담배 있냐?”'한조의 중얼거림에 바로 수강이 담배를 꺼내 내밀었다. 한조가 담배를 물고 앉아 피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사유의 피아노 소리가 뚝 그쳤다.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나 소파 쪽으로 오면서 수강을 보았다.'“왔어?”'이제라도 알아봐 줬으니 감사하다고 인사를 해야 하나 수강이 고민하는데 사유가 대뜸 물었다.'“담배 있어?”'왜, 부부가 같은 걸 물을까. 한조는 그렇다 치고 왜 사유가 그걸 물을까. 하지만 질문보다 먼저 몸이 반사적으로 담배를 꺼내 내밀고 있었다.'한 개비 꺼낸 뒤 사유가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녀는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한조가 앉아 있는 소파로 갔다. 한조의 허리 옆으로 한 뼘쯤 남을까 말까 한 작은 공간에 사유가 슬쩍 걸터앉더니 한조에게로 고개를 숙였다.'휘둥그레진 수강의 눈앞에서 사유는 한조가 태우는 담배에서 불을 나눠왔다. 사유의 행동도 행동이거니와 한조가 가만히 보고 있다는 게 수강은 기가 막혔다.'“이사유, 담배도 피우세요?”'수강은 어이가 없어서 말까지 이상하게 나왔다. 사유는 한조의 얼굴을 보면서 수강의 질문에 대답했다.'“즐거운 일이면 함께 즐기자고 했거든.”'가볍게 빨아들였다가 사느란 회색 연기를 공중에 뿜었다. 폼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기침 한 번도 없이.'“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