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몇 번 심호흡을 해봐도 마찬가지였다. 아인은 어느새 손바닥 가득 맺힌 식은땀을 청바지에 문질러 닦았다.'약속 시간 오 분 전.'괜한 짓을 하는 게 아닐까? 그녀는 오늘 아침 눈을 떠 집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가졌던 의문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아니야. 안 하고 후회하느니 하고 후회하는 편이 나아. 그렇지?'그녀의 고백을 들었을 때, 그가 어떻게 나올지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좋은 반응이 나올 거라는 기대는 거의 하지 않지만. 조금도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크게는 없다. 진짜로.'아인은 창밖을 바라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렇게 창가에 앉아 있으니 햇빛이 따사롭다. 아직은 추울 것 같은데, 나풀거리는 스커트에 달랑 카디건만 걸치고 나온 아가씨가 보였다. 하긴 오늘따라 유난히 날씨가 좋긴 했다.'세 시 정각. 딸랑거리는 종소리에 그녀는 재빨리 출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낯선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실망해 고개를 돌리다 그녀는 다음 순간 흠칫하며 일어서고 말았다. 왔다!'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선 창피함에 다시 앉으려고 하는데, 하필 그때 그와 눈이 마주쳤다. 카운터 앞에 서서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다가왔다.'“혹시 여기서 날 만나자고 한 사람이…… 이아인 씨입니까?”'“예? 예, 맞아요.”'그가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았다. 대체 자신이 왜 그녀를 만나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눈빛이다. 아인은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잠깐 앉으시겠어요? 진짜 잠깐이면 되는데. 얼마 안 걸려요.”'그가 내키지 않는 듯한 기색으로 맞은편에 앉았다.'“커피 드시겠어요? 아, 맞다. 커피 안 드시죠? 그럼 뭐가 좋을까?”'그녀는 당황해 직원이 갖다 준 메뉴판을 열심히 뒤적거렸다.'‘젠장, 왜 약속장소를 커피전문점으로 잡았지? 내가 정말 정신이 반쯤 나갔구나.’'“차는 됐습니다. 용건이 뭡니까?”'그가 손목시계를 보고 그녀에게 물었다. 웃음기 없는 쌀쌀한 그의 응시에 그녀는 혀가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뭐 우리가 서로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눌 만한 사이가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쳐다볼 것까진 없잖아. 사람 기죽게.'그녀는 있는 용기 없는 용기를 다 끌어 모았다.'“제가 며칠 전에 병원에 갔었거든요.”'‘으악! 야, 그 말은 왜 하는 건데?’'“아니, 그러니까 특별히 무슨 심각한 병이 있는 건 아니고요. 그냥 몇 가지 검사를 받았거든요. 다행히 아무 이상도 없대요.”'당황해서 더 횡설수설이다. 상대는 ‘그렇습니까?’ 하는 예의상의 응대도 없이 여전히 차갑게 쳐다볼 뿐이었다.'“병원 대기실에 앉아 기다리다가 거기서 책 한 권을 봤어요. 죽기 전에 하지 않으면 안 될 열 가지였나, 스무 가지였나? 암튼 그런 제목의 책이었는데, 다 본 건 아니고요.”'“그래서 요점이 뭡니까?”'“아, 그러니까 내가 지금 죽으면 가장 후회될 게 뭘까? 그 생각을 해봤는데,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그쪽 얼굴이더라고요. 이대로 아무 말도 안 하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서……. 그래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뵙자고 했어요.”'그녀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용감하게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고백했다.'“좋아합니다. 제가 그쪽을 많이…… 좋아해요.”'상대가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본다. 아인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그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저, 여기.”'아인은 허둥지둥 곱게 포장한 납작한 상자를 꺼내 그 앞으로 내밀었다.'“내일 밸런타인데이도 됐고 해서요. 초콜릿은 아니고 떡이에요. 찹쌀로 만든 경단이요. 별로 달지 않으니까, 먹기 괜찮으실 거예요.”'반응이 없다. 상대의 침묵에 그녀는 억지로 웃었다.'“하하,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어요. 밸런타인데이도 됐고 해서 그냥 드리는 거니까. 꼭 제 마음을 받아 달라 그런 건 아니고요.”'이번에도 반응이…… 없다.'‘으아, 어떡해? 이봐요, 제발 뭐라고 말 좀 해요! 싫으면 싫다, 생각지도 못한 거라 부담스럽다. 하다못해 난 그쪽을 여자로 본 적도 없다든지.’'“이거 박찬주 매니저, 장난입니까?”'“예? 찬주 언니…….”'뜻밖의 말에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장난이요?”'“아무리 선의라고 해도 이런 식의 장난은 불쾌합니다.”'“예?”'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그야말로 한겨울에 부는 눈바람처럼 냉랭했다.'“박찬주 매니저에겐 내가 따로 말을 하지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리고 두 번 다시 이런 장난은 사양합니다. 아시겠습니까?”'“예? 예, 그야 물론이죠. 하지만 전 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저기, 잠깐만요!”'그녀가 황급히 따라 일어서며 말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어느새 입구까지 성큼성큼 걸어간 그가 쌩 하니 유리문을 열고 나가버렸다.'“하, 하, 하하.”'혼자 남은 그녀는 허탈함에 웃고 말았다.'얘기가 왜 이렇게 되지? 잘못 하면 따귀 한 대 맞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 각오는 했었다. 각오가 좀 지나치긴 하지만, 뜻밖의 얘기에 상대가 불쾌해 할 수도 있는 거니까.'“누구십니까, 저를 아십니까?”'최악의 반응엔 이것도 있었지. 그런데 장난이라…….'아인은 힘없이 자리에 앉았다. 힐끔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른 척 무시하고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상자를 내려다보았다.'선물이라고 해서 그가 덥석 받아갈 성격이 아니란 건 예상했었지만, 그래도 허무했다.'아인은 곱게 포장한 종이를 찢고 상자를 개봉했다. 그 안에는 색색으로 고물을 묻힌 찹쌀 경단이 들어 있었다.'대추와 밤을 곱게 채 썰어 묻힌 것, 검은깨를 그대로 묻힌 것, 콩고물과 잣가루를 빻아 묻힌 것. 밸런타인데이니까 초콜릿도 한 개 묻혀 가장 중앙에 놓았다.'밀가루 음식과 단 걸 싫어하는 그를 위해 그녀가 어젯밤 만든 것이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경단을 하나 꺼내 입에 넣었다. '“내가 만들긴 했지만, 진짜 맛있네.”'그녀는 쫀득거리는 경단을 씹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다 창문 유리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뭐, 그런 거지. 짝사랑이란 게.'아인은 일 년 넘게 왼쪽 가슴 부근이 아픈 걸 꾹 참다가 결국 지난주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떠오른 건 그의 얼굴이었다.'‘만약 내가 말하지 않으면, 그는 내가 좋아한 것도 모를 테지. 앞으로도 계속.’'그 생각을 하니까 너무 아까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결국 그대로 사라질 감정이라는 게.'일주일 간 걱정하며 초조해 했던 것과는 달리 검사 결과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 다만 스트레스성 위염이 있다고 하니, 약 챙겨 먹고 관리만 잘하면 된다.'‘그래도 고백은 했으니까, 목표는 달성했네. 그렇지?’'비록 차갑게 무시당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아마 그는 몇 년쯤 후에 ‘나한테 갑자기 황당한 고백을 한 여자가 있었는데.’ 하고 떠올릴지도 모른다. 비록 그녀의 얼굴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아인은 다시 상자 안에서 경단을 꺼내 입에 넣었다. 역시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