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오세요.”'딸랑거리는 소리에 수연은 습관처럼 맑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입가에 접대용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눈앞이 암흑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당황한 나머지 수연은 숨을 멈추고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정오의 밝은 햇살을 등지고 서 있었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실루엣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눈을 감고 그리라고 해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 얼굴.'장신의 키,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질의 몸, 날카로우면서도 남을 꿰뚫어볼 듯한 짙은 눈동자, 오뚝한 콧날, 얼음장처럼 차가운 입술……. '차가운 입술이 서늘할 만도 한데 그 입술에 매료되어 정신을 못 차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숨결이 닿은 것만으로도 아찔한 감각에 정신이 혼미해지고 나른해져 얼굴에 붉은 꽃이 피어오르는지도 모른 채 입술을 받아들였었다. 그런 순간들마저 깡그리 잊고 싶게 만드는 남자가 눈앞에 햇살을 등지고 우뚝 서 있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한 몸에 받는 남자. 온몸에 카리스마를 새기고 다니는 남자. 그런 남자가 자신의 남자라는 사실에 한껏 고무되어 자부심이 굉장했던 적도 있었는데……. '모든 것들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남은 것은 분노와 공허뿐이었다. 남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는데 아직도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저 남자는 전혀 신경 쓰지도 않는데 자신만 또 애먼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는 걸 남자의 비릿한 미소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그녀의 버릇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초조할 때 입술을 괴롭히는 버릇이 있었다. 매번 지적을 받으면서도 그 버릇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오랜만이군.”'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사람의 가슴을 울리게 했다. 처음 듣는 사람들은 그 목소리에 매료되기도 하지만 그녀만은 예외였다. 저 가슴을 울리는 성대를 따라 내려가면 온통 차가운 피가 흐르는 얼음심장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의 심장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줄 몰랐고, 두려움과 고통을 안겨줄 뿐이었다.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마주보고 서 있자니 다리에서 힘이 죄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다행인 것은 그들 사이에 카운터가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녀에겐 보호막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을 비웃듯 천천히 다가오는 뼛속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눈빛에 그녀는 심장이 얼어버리는 것 같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마른침을 삼키며 감정을 숨기면서도 끝까지 시선만은 피하지 않았다. 예전의 그녀는 2년 전 아주 깊은 무덤 속에 묻어버렸다. 이젠 눈앞에 있는 남자로 인해 흔들리거나 상처받지 않을 수 있었다.'“그러네요.”'시간을 들이고 대답한 것치고는 괜찮았다. 혹여 불안함이나 떨림이 섞여서 나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차분함을 가장할 수 있을 것 같았다.'“잠깐 시간 낼 수 있나?”'“그건 힘들 것 같네요.”'수연의 대답에 상대방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듯했다. 좀처럼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 사람이니 착각일 수도 있었다. 가게 안을 둘러보는 시선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는 전부인 이 공간이 그에게는 먼지보다 더 못하게 보인다는 것을. 그에겐 거대한 왕국 앞에 놓인 한낱 미미한 모래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녀에겐 피땀이 배어 있는 곳이었다.'“그럼 잠깐 앉지.”'여전하다. 상대방의 의견을 물어보는 게 아닌 일방적인 지시. 상대방의 의견 따위 전혀 상관치 않는 남자. 예전에는 고운 시선으로 넘겼지만 지금은 곱게 보이지 않았다. 창가에 놓인 테이블에 자리를 잡으려는 그를 내보내고 싶었다. '“어쩌죠? 할 일이 좀 많은데.”'거부의 뜻이 분명한 반응에 뜻밖이라는 듯이 돌아보는 그를 외면하고 그녀는 아침에 들어온 세금계산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숫자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지만 무관심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당신이 이런 것도 하나?”'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저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무시하듯 말을 내뱉지는 않을 것 같았다.'현은 낯선 여자를 보는 것 같았다. 그가 기억하는 아내는 저렇게 차갑고 냉정한 여자가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커리어우먼보다는 집안에서 살림만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래서 보호해줘야 할 것 같은 그런 여자였다. '언제나 조용히 맡은바 일을 묵묵히 해내는 여자. 책임감에서만큼은 믿을 수 있는 그런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아무런 통보도 없이 사라졌을 때는 배신감에 분노가 폭발해버렸다. 나름 결혼생활에 충실했다고 생각했고, 부족한 것 하나 없이 해주었다고 생각했는데……. 더군다나 그녀를 향한 부모님의 사랑도 특별했다. 그렇게 귀애해 주셨던 분들에게 믿음을 저버린 여자. 그런 여자가 저렇게 당당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털끝만큼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최소한 그를 보는 순간 먼저 부모님의 안부라도 물었어야 했다. 아니, 그동안 이유야 어찌됐든 부모님에게라도 연락을 취했어야 옳았다. 어떠한 이유로도 그녀의 행동은 정당화 될 수 없었다. '“언제 닫나?”'“…….”'현은 어딘지 모르게 단단한 벽을 상대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안 좋았다. 어디서부터 오는 자만일까? 죄를 지었으면 저자세로 나와야 하는 게 당연한 건데 잘못한 것 하나 없다는 듯이, 그것도 모자라 시선조차 마주치기 싫다는 듯이 뻔뻔스럽게 행동하는 아내를 보자 목이라도 조르고 싶었다. 2년 동안 어떻게 견뎌왔는데…… 이 시간을 기다리면서 분노를 삭이고 또 삭였다. 찾아내기만 하면 그에 응당한 대가를 꼭 치르게 하리라 다짐하고 다짐했는데…….'그녀로 인해 짓뭉개진 자존심이 되살아나려면 그보다 더한 고통으로 돌려주어야 한다. 그러자면 그의 곁을 떠난 알량한 이유라는 것부터 들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처럼 도망갈 틈도 주지 않고 덮쳐야 했다. 그래야 아주 정확하게 숨통을 조일 수 있었다.'현은 잔인함이 스멀거리고 올라왔지만 아직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기다리지.”'현은 작은 테이블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서 있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차 안에서 기다릴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또다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좁은 가게 안에 남기로 했다. '그는 자리에 앉으며 작지만 숨을 들이켜는 소리를 듣고서야 조금은 만족스러운 마음에 여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의 등장으로 분명 당혹해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자신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는 아내의 매정함에 현은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다. '카운터와 쟁반을 무기삼아 그와 거리를 두려는 아내를 지켜보는 것도 한계가 오기 시작할 때, 반가운 표정으로 들어오는 남자가 있었다.'“수연 씨, 저 왔어요.”